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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버드 특강 "정의" - 12부 정의와 좋은 삶

다니엘22 2011. 9. 5. 04:18

12강. 정의와 좋은 삶

(Debating Same-Sex Marriage/The Good Life)

 

<개요>

 

정의는 좋은 삶에 대한 질문에서 분리될 수 있는가? 정의의 원칙을 정하는 문제는 결국 올바른 도덕적, 본질적 가치의 문제로 귀결되지는 않는가? 만일 정의를 선이나 좋은 삶에 결부시킬 수밖에 없다면 다원적 사회에서 각자가 생각하는 선이나 좋은 삶은 모두 다른데 어떻게 공동선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오늘은 칸트와 롤스의 자유주의적 정의론에 대한 공동체주의자들의 비판을 검토하며 정의는 선에 결부될 수밖에 없고 공동선을 도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동성혼 문제를 토론해본다.

 

공동체주의자들의 비판처럼 소속, 연대, 충성의 의무가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자연적, 자발적 의무, 인간의 보편적 의무에 종속돼야 한다는 자유주의적 정의론은 항상 보편적 의무를 특수한 의무보다 우선시한다. 문제는 몬테스키의 명언처럼 언제나 보편적 의무를 우선시하는 도덕군자에게는 친구가 없다는 점이다. 모두가 도덕군자가 되는 이런 사회는 실현 불가능할뿐더러 인간사회로 볼 수가 없다. 따라서 서사적 자아개념, 제 3의 의무를 말하면서 정의를 선의 문제로 보는 공동체주의자들의 입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하지만 정의를 선에 결부하는 방식도 두 가지가 있다는 점이다. 첫째는 노예제를 옹호한 미국 남부인들처럼 정의를 특정한 사회의 공통된 이해, 전통으로 보는 시각이다. 이때 정의는 상대적인 개념이 되고 특유의 비판적 성격을 상실한다. 반면 정의를 본질적 선에 결부하는 두 번째 방식, 비상대적 접근도 있다. 엄밀히 말해서 공동체주의라고 할 수 없는 이 방식을 동성혼이나 낙태 문제에 적용해보자.

 

동성혼 문제는 정의와 권리의 개념이 모두 포괄된, 사회적으로 어떤 식으로든 판단해야 하는 문제다. 또한 결혼의 목적, 동성혼의 도덕성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 가치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문제이므로 정의와 선의 관계를 토론하기에 적합한 주제다. 기독교에서 말하듯 동성혼은 죄악이기에 이성혼만 인정해야 할까? 동성혼도 이성혼처럼 인정해야 할까? 아니면 애초에 결혼을 인정하는 건 국가의 역할이 아닐까? 열띤 토론을 마치고 이견들을 정리하며본 강의의 주제였던, 정치철학이 추구하는 공동선의 정치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강의 내용>

 

지난 시간에는 ‘서사적 자아개념’이 무엇인지 알아봤습니다. ‘서사적 자아개념’을 설명하며 연대나 소속의 의무를 검토해봤습니다. 이런 의무들은 합의에서 발생하지 않죠. 우리가 한 계약이나 합의, 선택과는 무관한 의무들입니다. 지난 시간 우리가 토론한 주제는 ‘이런 의무들이 실제로 있는가? 있다면 이 모든 연대와 소속의 의무는 독립된 의무가 아니라 합의와 상호이익에 따른 의무나 인간의 보편적 의무로 환원될 수 있는가?’였죠. 충성심과 애국심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얘기도 들어봤습니다. 이 논쟁에서 충성과 연대, 소속이란 개념이 우리의 도덕적 직관에 호소하며 설득력을 얻었죠?

 

또 끝에 가서는 이 개념에 강력한 반박처럼 보이는 사례를 살펴봤습니다. 바로 1950년대 남북전쟁 당시 인종차별을 옹호한 남부인이었는데 이들이 말한 것은 오직 자신들의 전통과 역사, 정체성을 자신들이 살아온 역사에 결부시키는 방식이었죠? 이 남부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서사적 정체성 인식을 본 소감이 어땠나요? 전통을 고집하려는 이들의 태도는 공동체주의가 표방한 서사적 자아개념의 치명적, 결정적 결함은 아닐까요? 이 질문을 끝으로 지난 수업을 마쳤는데 오늘은 이 논의를 좀 더 진전시켜 어떤 결론이 나는지 보도록 합시다.

 

오늘 우리가 검토할 주장은 바로 저처럼 자발적 자아개념에 대한 비판으로 서사적 자아개념을 옹호하면서 연대나 소속의 의무가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저는 그런 의무들이 있다고 봅니다. 결국 정의는 선에 대한 질문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그런 의무들이 있다는 거죠. 물론 정의를 선에 결부하는 방식도 양극단으로 나뉘니까 그 중 하나를 말한 겁니다. 이미 살펴봤듯 칸트와 롤스의 자발적 자아개념은 강력한 해방의 개념입니다. 여기 담긴 보편적 열망은 더욱 호소력이 크죠. 어떠한 편견이나 차별도 없이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려는 태도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죠. 소속의 의무가 있다고 해도 항상 종속적이어야 한다고요. 앞서 말한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의무가 항상 먼저란 거죠. 과연 그럴까요? 이 논리대로라면 보편적 충성은 언제나 특수한 충성에 앞서야 하고 친구와 타인의 구분도 극복해야 좋은 거겠죠. 친구가 잘 살기를 바라는 각별한 애정은 일종의 편애로 그런 마음이 강할수록 보편적 인류애의 부족을 뜻하겠죠. 그런데 이런 생각을 잘 뜯어보면 이런 생각은 결국 어떤 도덕세계, 어떤 도덕적 상상에 도달할까요?

 

이에 대해 계몽주의철학자 몬테스키는 가장 정곡을 찌르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이런 무자비한 보편화 경향이 어떤 도덕적 상상에 도달하는지 지적했죠. 몬테스키는 말합니다.

 

“진정한 성인군자라면 생판 모르는 남이라도 친구처럼 즉각 도와줄 것이다.” (몬테스키)

 

이어지는 말을 잘 들어 보십시오.

 

“완벽한 성인군자가 되면 친구가 없을 것이다.” (몬테스키)

 

이런 세상은 상상이 안 되죠? 사람이 완벽한 성인군자라 친구가 없고 보편적 호인 기질만 가지는 세상은요, 문제는 이런 세상이 비현실적이라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세상을 인간 세상으로 보기 어렵다는 거죠. 인류애는 고귀한 감정이지만 우리는 더 작은 연대들을 기반으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동정심에는 한계가 있는 거겠죠.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바로 인류애는 추상적으로 배우는 감정이 아니라 구체적인 표현들을 통해 배운다는 점입니다. 이게 우리가 고려할 의견입니다. 절대적인 주장은 아니죠.

 

도덕철학이 제공하는 건 절대적인 주장이 아니라 고려사항들입니다. 지금까지의 토론과 논쟁에서 본 것처럼 어떤 말이 맞다고 합시다. 상대의 의견이 옳은지, 의무에 대한 이런 생각이 옳은지 평가하는 방법은 정의로운 결론이 나는지를 보면 되겠죠? 이 지점에서 남부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합니다. 그들도 역사의 무게를 느끼지만 우리가 그들을 존경합니까? 전통을 고수하려는 이 사람들의 생각을 정의라고 할 수 있나요? 아무리 연대와 소속의 의무를 인정한다고 해도 남부의 인종차별주의자들처럼 특정한 공동체나 전통이 정의라고 규정한 건 뭐든지 다 정의입니까?

 

그래서 정의를 선에 결부시키는 두 가지 방식을 구분하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하나는 상대적인 결부방식인데 이렇게 보는 거죠. 바로 권리와 정의를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공동체를 지배하는 가치들로 보는 겁니다. 권리와 정의를 외적 잣대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특수한 전통의 산물, 내부의 공통 이해를 충실히 따르는 것으로 보는 거죠. 이렇게 정의를 선에 결부시키는 방식의 문제는 정의를 전통의 산물로만 본다는 겁니다. 환경의 산물로만 보는 거죠. 정의의 비판적 성격이 사라집니다.

 

반면 정의를 선에 결부시키는 두 번째 방법도 있습니다. 정의를 선 개념에 비상대적으로 연결하는 방법이죠. 정의의 원칙들은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라도 특정한 시기, 특정한 장소에 지배적인 가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권리가 추구하는 목적의 도덕적 가치, 본질적 선에 따라 정당화되죠. 이 비상대적 관점에서 어떤 권리에 대한 인정은 그 권리가 인류의 선을 존중하거나 증대시켰는지를 보고 결정합니다. 정의를 선에 결부하는 이 두 번째 방식은 엄밀히 말해 공동체주의는 아닙니다. 공동체주의란 특정한 공동체가 마음대로 정의를 규정하는 거니까요.

 

정리하면 정의를 선에 결부하는 이 두 가지 방식 중에 첫 번째 방식은 부족하다는 겁니다. 정의가 전통의 산물이 되니까요. 기존의 생활방식과 전통을 들먹이는 남부 인종차별주의자들을 보면 도덕적으로 부족한 대답이잖아요. 그런데 정의를 선에 비상대적으로 결부하는 방식도 큰 난관이 있습니다. 선을 어떻게 추론하느냐는 거죠. 각자가 생각하는 선이나 사회제도의 목적은 다 다른데 말입니다. 각자가 인정하고 존중하고 싶어 하는 사회적 선, 인류의 선도 다 다릅니다. 다원주의 사회니까 선에 대한 의견들이 있죠. 정의의 원칙들이 특정한 목적이나 선에 좌우돼서는 안 된다고 한 것도 이런 다원성 때문이었으니까요.

 

그런데도 무엇이 선인지 알아낼 길이 있을까요? 좀 더 쉬운 질문으로 이 답에 접근해 봅시다. 정의를 논할 때 선에 대한 논의는 꼭 필요하고 불가피한 일일까요? 제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불가피하고 꼭 필요한 일입니다. 오늘 남은 시간이 이 주장을 더 발전시켜보도록 하겠습니다. ‘선을 찾아내는 것, 목적을 찾아내는 것이 정의를 논할 때 꼭 필요하고 불가피하다.’ 이 주장을 입증해 보자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동성혼 토론을 제안했습니다.

 

동성혼 문제에는 굉장히 논쟁적인 주제들이 얽혀 있습니다. 도덕적, 종교적으로요. 이렇게 적합한 주제도 없을 겁니다. 정의와 권리의 개념을 모두 아우르며 사회적 차원에서 어떻게든 판단을 내리게끔 하는 도덕적, 종교적으로 뜨거운 쟁점들이 얽혀 있으니까요. ‘동성애를 도덕적으로 허용할 것인가?’ ‘사회제도로서 결혼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 문제들에 어떻게든 답을 내려야 사람들의 권리를 규정할 수 있고 이런 도덕적, 종교적 논쟁은 사회적 차원에서 해결할 문제라면 아주 매력적인 주제죠. 지금부터 동성혼이란 주제를 통해 이 둘이 분리될 수 있는지 봅시다. 동성애를 보는 개인의 도덕적 관점과 결혼의 목적에 대한 관점이 국가가 동성혼을 허용할지 말지의 문제와 분리될 수 있는지 보자는 겁니다.

 

먼저 국가의 동성혼 인정에 반대하는 입장부터 들어 보도록 하죠. 국가는 남녀의 결혼만을 인정해야 한다는 분? 지원자가 없으면 우리 블로그에 의견을 올린 두 학생을 지목해도 될까요? 마크 러프, 라이언 메카프리 어디에 있습니까?

 

- 네, 마크? 라이언은 어디 있죠? 네. 마크의 의견부터 들어 보죠.

- 저는 성교나 결혼을 목적론적으로 봅니다. 저처럼 기독교를 믿는 가톨릭 신자한테 성교의 목적은 첫째가 출산이고 둘째는 남녀의 결합이라고 봅니다. 결혼제도 안에서의 결합이죠.

- 결혼의 목적, 텔로스를 봤을 때

- 네.

- 성의 목적은 출산이란 거군요?

- 네.

- 부부의 결합이고요?

- 네.

- 사회제도로서 결혼의 본질, 결혼의 목적은 출산이란 결혼의 목적, 텔로스를 표출하는 것이자 예우하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될까요?

- 네.

 

- 라이언 생각도 들어 볼까요? 마크 의견에 대체로 동의하나요?

- 네, 동의합니다. 결혼에는 출산의 개념도 포함되니까요. 동성애자들이 자기들끼리 동거를 하는 건 괜찮지만 국가가 그걸 권장할 의무는 없죠.

- 네, 국가는 동성혼을 인정함으로써 동성애를 권장해서는 안 된다는 거군요.

- 네, 법으로 금하는 건 잘못이겠지만 그렇다고 권장할 필요도 없잖아요.

- 의견 있으신 분? 말씀하세요. 해나?

 

- 마크한테 질문이 있는데요. 여자 친구와 혼전 성관계를 갖지 않고 결혼을 했는데 결혼하고 나서 불임인 걸 알았을 때 임신을 못한다는 걸 알고도 성관계를 하면 불법이란 건가요?

- 제가 이중의 목적을 말한 것도 그래서인데요. 나이 든 남녀도 결혼은 할 수 있죠. 나이가 많은 여자도… 폐경을 해서 임신을 못해도 성관계는… 출산 이상의 목적이 있으니까요.

- 무례한 질문이긴 한데 자위해 봤나요?

- 잠깐, 대답할 필요 없어요.

- 이 질문은 피하고… 잠깐만요.

- 자기 입장만…

- 아뇨, 대합할게요.

- 아뇨, 그냥…

- 잠깐, 지금까지 우리 모두 잘해왔잖아요. 한 학기 동안 대학에서는 토론조차 못할 것 같은 주제들을 잘 다뤄왔죠. 해나가 강타를 날리긴 했는데 웬만하면 좀 일반화하는 게…

- 네.

- 유도신문하지 말고 뭡니까?

- 네.

- 하고 싶었던 말이 뭡니까? 어떤 의도로 물어본 거죠?

 

- 네, 성서에서…

- 제삼자에 빗대서 말해야지...

- 대놓고 말하면 곤란합니다.

- 네, 죄송해요.

- 성서에서 자위, 즉 수음은 죄악입니다. 대지에 씨를 뿌리는 수음은 출산으로 이어지지 않으니까요. 지금도 출산이나 부부관계 강화가 아닌 성행위는 다 잘못이라는 말로 들리는데

- 네.

- 그럼 이건 어떤가요? 자위행위도 아이가 생기는 건 아닌데 왜 이건 허용되죠?

- 결혼을 독립된 사회제도로 만든 건 미덕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일상에서 우리는 여로모로 그 미덕에는 못 미치겠지만 개인적으로 우리가 어떤 도덕적 영역에 못 미치더라도 그렇게 말할 권리가 없는 건 아니죠.

 

- 네, 둘 다 서 있어요. 다른 의견을 들어본 뒤 다시 얘기하죠. 말씀하세요.

- 제 생각에 자위는…

- 잠깐, 이름이?

- 스티브요.

- 계속하세요.

- 자위는 허용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동성애도 사회가 불허할 문제는 아니고요. 자위하는 사람이 자기와 결혼하겠다면 사회가 무슨 수로 말리죠?

- 좋습니다. 해나? 네, 스티브, 아주… 아주 좋은 지적입니다. 스티브가 두 가지를 명확히 짚어냈죠? 하나는 다양한 행위의 도덕적 허용 문제고 또 하나는 도덕적 허용의 문제를 떠나 어떤 행위의 적합성 문제, 국가의 결혼승인을 통해 얻게 되는 명예나 인정의 문제니까 스티브가 날카로운 지적을 한 건데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 인간의 성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고 피할 수 없는 것이라 보는데요. 자위는… 네, 물론 혼자 결혼할 순 없죠. 하지만 확실한 건 동성애자도 사람이란 겁니다. 왜 그들만 결혼을 하면 안 된다는 거죠? 혼자 결혼을 하고 싶다면 법적으로 가능할지는 몰라도 말리진 않겠지만…

- 잠깐! 잠깐! 잠깐만요! 우리가 입법가라서 혼인법이 어때야 하는지 결정해야 한다면 스티브를 말리지 않겠다고 했는데 입법가로서 찬성표를 던진다? 이렇게 광범위한 혼인법을 만들어 혼자 결혼하는 사람도 생기게요?

- 그럼 도를 넘는 일도 생길 텐데 그건 좀…

- 원칙적으로요.

- 원칙적으로요? 네, 스티브가 혼자 결혼하겠다면 말릴 순 없죠.

- 국가 차원에서 독신결혼을 공인한다고요?

- 안 될 건 없죠.

- 합의하에 여러 명과 동시에 결혼하는 건요?

- 전 당사자들이 동의하면 일부다처나 일처다부도 용인될 수 있다고 봅니다.

 

- 다른 사람도 할 말이 많을 텐데… 네, 학생! 일어나서 이름부터 말씀하시고

- 빅토리아입니다. 지금까지 쭉 결혼의 목적을 논의했는데 문제는 가톨릭의 시각에서만 본다는 겁니다. 다른 종교인이나 무신론자에게 결혼의 목적은 전혀 다를 수 있는데요. 국가가 가톨릭에서 말하는 결혼의 목적을 국민에게 강요할 권리는 없지 않나요? 동성혼 불허의 문제도 마찬가지죠. 어떤 종교를 믿든 상관없는 것처럼요. 하지만 동성 간의 시민적 결합은 가톨릭교회의 결혼이 아닙니다. 국가는 원하는 사람들에게 동성 간의 시민적 결합을 공인할 권리는 있지만 그 어떤 소수나 다수의 종교적 신념을 국민에게 강요할 권리는 없다고 봅니다.

- 좋습니다. 빅토리아. 하나만 묻죠. 그래서 국가가 동성혼을 인정해야 할까요? 아니면 동성 간의 시민적 결합은 결혼이 아니라고 봐야 할까요?

- 제 말은… 국가가 그 문제를 교회처럼 인정할 권리가 없다는 뜻이죠. 국가의 역할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시민적 결합은 종교를 벗어난 거니까 국가가 공인할 권리는 있다고 봅니다.

- 네, 빅토리아 말은 국가가 결혼의 목적을 규정하려 들면 안 되고 그건 종교가 할 일이라는 거죠? 다른 사람?

 

- 저는 대체 왜 국가가 결혼을 인정해야 하는 지 이해가 안 돼요. 저는 국가가 어떤 결혼도 승인해서는 안 된다는, 저 70명 중의 한 사람인데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이든 두 남자나 두 여자의 결합이든 나 혼자 결합하든 그걸 왜 국가에 허락을 받아야 하죠? 국가가 이 결혼을 승인해야 아이한테 좋다든가 상대를 구속하기 때문인가요? 실제로는 상대를 구속할 수도 없는데요.

- 네 이름이 뭐죠?

- 세잔이요.

- 빅토리아와 세잔의 입장은 논의의 출발점부터 다르지만 둘 다 국가의 역할이 아니라고 합니다. 결혼이나 성의 어떠한 텔로스, 목적을 존중하거나 인정하거나 단언하는 것은요. 그중에서도 세잔은 국가의 승인 따윈 필요 없다는 입장인데, 질문이 있습니다. 세잔처럼 국가의 승인 따위는 필요 없다고 하면 동성혼 문제도 마찬가지로 결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결혼의 목적을 놓고 도덕적, 종교적 논쟁을 벌일 것도 없이요. 발표자 모두 수고 많았습니다. 다음에 다시 토론하죠. 정말 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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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두 가지 질문에 답해야겠죠? 첫째, 정의를 논할 때 좋은 삶에 대한 질문이 꼭 필요하고 불가피한가? 그렇습니다. 둘째, 정의에 대한 추론은 가능한가? 네, 가능할 겁니다. 이번 시간에는 두 가지 질문에 더 자세히 대답해 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엔 이 질문에 대답하려고 동성혼 문제를 토론해 봤는데 일부는 동성혼을 반대하는 근거로 결혼의 목적, 텔로스를 언급했습니다. 아이의 양육과 출산이 적어도 결혼의 목적 중 하나란 이유에서였죠. 이어서 동성혼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앞서 말한 결혼의 목적, 텔로스에 이의를 제기하며 그것이 이성 간 결혼에 꼭 필요한 조건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자식을 낳을 능력과 의사가 있어야만 결혼하는 건 아니니까요.

 

불임부부도 결혼할 수 있다는 게 해나가 마크한테 지적한 것이었죠? 또 다른 입장도 있었습니다. 토론 끝 무렵에 빅토리아가 제시한 의견인데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의견입니다. 적어도 국가나 법률의 차원에서 결정할 문제는 아니란 거죠. 좋은 결혼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도덕적, 종교적 신념이 다른 다원주의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법률과 권리의 기틀은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도덕적, 종교적 이견들을 존중해야 하니까요. 재미있는 건 이렇게 중립을 옹호하는 사람 중 일부는 딱히 이성혼을 지지하지도 않고 동성혼을 허용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중립이라는 명목 하에 제3의 가능성을 주장하죠. 결혼을 인정하는 일 자체가 국가의 역할이 아니란 제3의 가능성입니다. 이번에는…

 

이 논쟁에 흥미로운 공헌을 한 안드레아 메이로스의 입장입니다.

 

- 중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답했던데 안드레아 어디 있죠? 네, 안드레아, 마이크 들고 입장표명 부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동성혼처럼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문제에 국가가 중립을 지키는 게 왜 잘못이죠?

- 중립이 가능한가요? 사람들의 삶은 각자의 세계관에 녹아들어 있는데요. 저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국가의 역할은 옳고 그름에 대한 합의를 도출해내는 것이라 보거든요.

- 동성혼 문제에 중립이 가능하냐는 질문은 낙태 문제에도 적용될 수 있는데 낙태를 허용할지 금지할지 결정할 수 있을까요? 낙태에 대한 확고한 입장이나 도덕적 판단이 없이도요?

- 아뇨, 그래서 논란이 있는 거겠죠. 태아를 생명체로 볼 건지 말 건지 사람들 생각은 아주 확고하니까요. 태아도 기본적으로 생명을 유지할 권리가 있는 생명체로 본다면 나와 무관한 일이니 마음대로 하라는 말은 못하죠. 난 낙태를 살인으로 보지만 허용하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니까…

- 네, 이와 유사한 동성혼 문제에서도 안드레아는 동성혼을 옹호한다고 했죠?

- 네!

 

- 그런데 동성혼을 옹호하게 된 게 그 밑바탕에 깔란 도덕적 질문에 설득을 당해서라는 거군요?

- 네, 특히 미국인 중에는 종교적 신념을 따르는 사람이 많은데 마크처럼 저도 가톨릭교도지만 수많은 기도와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제가 내린 결론은 가톨릭의 입장과는 달리 동성애는 죄악이 아니라는 거죠. 하느님과 교감에서 그런 결론에 도달했는데 종교 얘기라고 기피할지는 몰라도 대부분 종교적 신념과 관점은 있잖아요. 그래서 국가에서 난 상관없으니 동성혼을 하라는 식엔 반대한다고요. 그런 도덕적 무관심에는요.

 

- 좋습니다. 누구 대답할 사람?

- 안드레아는 잠깐 기다려주시고 이 말에 대답할 사람 없나요? 동성혼을 허용할지 말지 결정하려면 동성애의 도덕적 위상을 정립할 필요가 있으며 결혼의 목적, 텔로스를 생각하는 게 필수적이라고 했는데 이 점에서 안드레아와 생각이 다른 사람? 말씀하세요.

- 개인의 도덕적 견해와 법적인 당위는 구분돼야 합니다. 가령 저 같은 경우 솔직히 낙태는 도덕적으로 잘못이라고 보지만 법으로 낙태를 금한다고 낙태가 사라질까요? 전 낙태를 합법화해 여자들에게 선택권을 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자기 안전이 걸린 문제니까요. 마찬가지로 동성혼도 제가 도덕적으로 싫어한다고 해서 법으로 남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자유까지 방해할 생각은 없습니다.

- 안드레아?

- 합법과 불법이란 규정은 공공연하게 무언가를 승인하거나 불허한다는 뜻이니까 낙태를 합법화하면 사회적으로 모두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죠. 사회적으로 낙태를 해도 괜찮다고요. 낙태를 불법화하면 사회적으로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거고요.

- 이름부터 말하고 대답하죠?

- 대니얼입니다.

- 대니얼, 대답하세요.

- 낙태가 괜찮다는 뜻이 아니라 정 낙태를 하려면 숨어서 하지 말고 안전한 병원에서 하라는 말입니다.

 

- 네, 동성혼의 문제로 한정하면 어떤 입장이죠? 법적으로 동성혼을 허용하는데 찬성하십니까?

- 당연히 법으로 허용해야 합니다. 그런다고 제가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두 성인 남자가 결혼한다는 데 제가 무슨 수로 반대하죠?

- 나한테 피해는 없으니까?

- 네, 도덕적으로 전 반대하지만요.

- 네, 매사추세츠 법정이 동성혼에 대해 중대한 판결을 내를 때도 지금 두 사람이 말한 이 입장들이 쟁점이 됐는데, 둘 다 수고 많았어요.

 

당시 법정은 이 굿리지 소송에서 어떤 판결을 했을까요? 메사추세츠 주는 결혼의 범위를 동성까지 확장할지 판단해야 했는데 당시 법정은 처음에는… 네, 나중엔 입장이 바뀌었죠. 판결문을 잘 읽어보면 당시 재판도 지금 안드레아와 대니얼처럼 치열하게 대립해 결국 법정도 입장을 바꿨습니다. 처음에 법정은 마거릿 마셜 대법관의 말에 따르면 처음에 법정은 자유주의적 중립을 고수하려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으로 한정되어야 하며, 동성 간의 행위는 부도덕하다는 뿌리 깊은 종교적, 도덕적, 윤리적 신념을 갖고 있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이 동성끼리도 결혼할 권리가 있으며, 동성애자도 이성애자와 다르지 않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강한 종교적, 도덕적, 윤리적 신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어느 관점도 우리 앞에 놓인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법에 보장된 개인의 자율과 평등에 대한 존중이다. 독점적 약속을 주고받을 상대를 선택할 개인의 자유 말이다.” (메사추세츠 대법원 판결)

 

즉, 문제는 어떤 선택에 대한 도덕적 가치판단이 아닌 개인의 선택권이란 거죠. 이게 당시 법정이 표방한 자유주의적 중립, 자율과 선택, 합의를 강조하는 자발주의적 시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법정도 동성혼 인정에 대한 이러한 자유주의적, 중립적 태도가 자신들을 궁지에 몬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단지 개인의 자율을 존중하는지 마는지의 문제라면 그래서 국가가 자발적이고 친밀한 관계의 도덕적 가치판단에 정말 중립적이라면 국가는 다른 정책을 채택해야만 하니까요. 국가나 주의 역할을 없애야 할 겁니다. 어떤 연합이나 결합을 인정하는 건 국가의 역할이 아니라고 말하는 셈이죠. 국가가 정말로 중립적이어야 한다면 지금 말한 이 세 번째 입장을 고수해야 할 겁니다.

 

마이클 킨슬리가 칼럼에서 말했듯 적어도 국가 기능으로서의 결혼제도 폐지를 말해야겠죠. 더 정확히 말하면 종교의 해체를 말해야 합니다. 킨슬리의 지적에 따르면 “동성혼에 반대하는 이유는 중립적 관용을 넘어 정부 승인 도장을 찍어주는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게 이 논쟁의 핵심이죠.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말하면 이것은 공직과 명예의 배분, 사회적 인정의 문제입니다. 동성혼은 자유주의적 중립이나 비차별주의, 자율권만으로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공적 논쟁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동성 간의 결합이 도덕적 가치가 있는지, 명예와 인정을 받을 가치가 있는지, 결혼제도의 목적에 합치되는지 여부니까요.

 

그래서 킨슬리는 말합니다. ‘그렇게 중립을 원하는가?’ ‘그럼 교회나 다른 종교시설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 있게 하자. 원한다면 백화점이나 카지노도 좋다.’ 킨슬리는 말합니다. 아무 때고 두 사람이 택한 대로 서로의 결합을 축하하고 결혼했다고 여기게 하자. 세 사람이 결혼하든 자기 혼자 자기와 결혼하든 누군가를 주례로 세워 부부로 선언해주기를 바라든 국가는 상관없는데 무슨 걱정인가?’(마이클 킨슬리) 킨슬리의 입장입니다.

 

하지만 매사추세츠 연방대법원이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죠. 결혼제도의 폐지를 원한 건 아니니까요. 법정은 보다 친밀한 결합을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게 국가의 역할이란 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래서 반대로 결혼을 열렬히 옹호했죠. ‘결혼은 우리 공동체가 큰 포상을 내리고 매우 소중히 여기는 제도’라고 한 뒤 결혼의 정의에 동성 배우자를 포함시켰습니다. 이로써 법정도 인정한 셈입니다. 결혼은 개인의 선택을 인정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승인과 명예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걸 말입니다.

 

마셜 대법관에 따르면 ‘실제로 결혼에는 세 명의 공조자가 있다’고 합니다. ‘배우자가 되려는 두 사람과 그것을 승인하는 국가’까지요. ‘결혼은 상대를 향한 지극히 개인적인 약속인 동시에 상호관계, 동반자관계, 친밀함, 충실, 가족이라는 이상에 대한 매우 공적인 축하다.’(매사추세츠 대법원)

 

이 판결은 자유주의적 중립을 뛰어 넘는 판결입니다. 결혼을 명예로운, 사회적 공인의 형태로 본 겁니다. 즉, 법정이 결혼의 목적에 대한 논쟁을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는 뜻이죠. 마셜 대법관의 판결은 결혼의 일차목표가 출산이란 생각을 의식적으로 거부한 겁니다. 결혼을 신청한 남녀들의 가임 능력과 출산의도를 확인할 필요는 없다는 거죠. 가임 능력이 결혼의 조건은 아닙니다. 임종을 앞둔 사람도 결혼은 하잖아요.

 

지난 시간에 우리가 토론했던 문제들을 다 고려한 겁니다. 결혼의 목적, 본질, 텔로스를 보는 입장들을 모두 고려해 판결하길

 

“출산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독점적이고 영원한 약속이 바로 결혼의 본질이자 목적이다.” (매사추세츠 대법원)

 

지금까지 제가 말한 판결문을 잘 보면 동성혼에 대한 찬반입장은 없지만 이런 주장은 정면으로 거부하죠? 도덕적, 종교적 중립을 유지한 채 이런 문제를 판단할 수 있다는 주장은요. 이 사건이 암시하는 건 우리 사회에서 정의와 권리를 둘러싸고 뜨겁게 논쟁할 때 적어도 어떤 경우엔 합의와 선택, 자율의 문제라며 중립을 유지하려는 태도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이런 도덕적, 종교적 분쟁에서 가장 중립적이어야 할 법정도 실패했잖아요.

 

이제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정의와 권리를 논할 때 선에 대한 추론이 불가피하다면 선을 찾는 건 가능한가 하는 문제였죠? 만일 선을 찾아낸다는 것이 항상 어떤 도덕적 판단의 근거가 되는, 좋은 삶에 대한 단일한 원칙이나 규칙, 금언,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라면 선을 찾는 건 불가능합니다. 꼭 단일한 원칙을 가져야 하는 건 아닙니다. 좋은 삶이나 정의에 도달하는 최선의 방법도 아니고요. 우리가 지금까지 토론한 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정의와 권리, 때로는 좋은 삶에 대해 토론한 것들을요. 이런 주장들이 어떻게 전개됐죠? 정확히 이렇게 전개되지 않았나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대로 판단과 원칙을 왔다 갔다 했을 겁니다. 구체적 사례, 사건, 이야기, 질문마다 우리의 판단은 왔다 갔다 했습니다. 어떤 사안과, 그 사안의 판단근거가 되는 일반 원칙들 사이를 왔다 갔다 했죠. 이런 변증법적 도덕추론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부터 해온 방법인데 그 시대에서 그치는 건 아닙니다. 이런 소크라테스식 변증법적 도덕추론은 존 롤스의 확실하고 강력한 지지를 받았으니까요. 롤스는 이 방법을 정의론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롤스가 주장한 건 무지의 장막과 정의의 원칙들만은 아닙니다.

 

일명 ‘반성적 평형’이라 부르는 도덕추론, 정의추론법도 있었죠. ‘반성적 평형’은 어떤 방법일까요? 구체적 사안에 대해서 충분히 검토한 뒤 판단하는 겁니다. 어떤 판단과 그 근거가 되는 원칙들을 오가며 검토하는 거죠. 거기서 그치지 않고, 최초의 직관이 틀릴 수도 있으므로 거기서 그치지 않고 우리가 정립한 원칙들에 비추어 특수한 판단을 수정하기도 하는 거죠. 때로는 원칙을, 때로는 구체적 사안에 대한 판단과 직관을 수정하는 겁니다. 요약하면 이런 건데 롤스의 말을 인용해 보죠.

 

“정의란 개념은 자명한 전제들에서 도출되는 게 아니다. 많은 것들을 고려하고 하나의 일관된 관점에 모든 것들이 서로 맞아떨어질 때 그 개념은 정당하다.” (존 롤스)

 

<정의론> 후반부를 또 인용하면

 

“도덕철학은 소크라테스적이다. 현재 우리가 숙고한 판단들은 그 바탕에 깔린 원칙들이 분명해지면 바꾸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존 롤스)

 

롤스가 ‘반성적 평형’이란 개념을 수용하고 진전시켰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기는데 롤스는 왜 정의를 도덕이나 좋은 삶에 연결시키지 않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개인의 권리가 공동선에 앞선다고 주장한 이유는 뭘까요? 롤스는 반성적 평형으로 정의와 권리에 대해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는 있지만 좋은 삶에 대한 판단이나 광범위한 도덕적, 종교적 해답은 서로 같지 않을 것이라고 봤습니다. 롤스가 이렇게 본 이유는 현대사회에서는 각자가 생각하는 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판단력이 뛰어난 양심적인 사람도 좋은 삶이나 도덕, 종교에 대한 생각은 다를 수 있으니까요. 이 점에 관한 한 롤스의 지적이 옳을 겁니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의견충돌은 실제로 일어나니까요. 또 좋은 삶이나 종교적 도덕적 문제를 놓고 끊임없이 의견충돌이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이런 현실을 인정한다면 정의에 대해서도 롤스처럼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실 다원주의 사회에선 각자가 생각하는 정의가 다 다른 건 아닐까요? 또 각자가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습니까? 누구는 자유주의 정의론을 지지하고 또 누구는 보다 평등한 정의론을 지지하며 서로 싸우죠? 다원주의 사회에는 자유방임주의적 정의론부터 보다 평등한 정의론까지 다 있습니다. 그런데 원칙적으로 이런 분리가 가능할까요? ‘도덕적 추론’이란 것은 원칙적으로 정의에 대한 각자의 견해와 다른 겁니까? 언론과 종교의 자유를 보는 각자의 견해와는 다른 건가요?

 

우리 토론에선 어땠나요? 대법원 판사들 얘기를 하면서 정의와 권리에 대한 생각은 다 달랐죠. 이런 현실의 다원주의를 인정한다고 해도 정의와 권리에 대한 견해가 도덕과 종교에 대한 견해와 다른 겁니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두 경우 모두 의견이 충돌할 때 우리는 상대와의 토론에 몰입합니다. 한 학기 내내 우리가 해왔던 것처럼요. 우리는 어떤 사안에서 발생하는 여러 주장을 고려해 어떤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는 논리를 더 강화하려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논리를 경청하며 때로는 설득을 당해 우리 시각을 수정하거나 반론에 맞서 적어도 자기 논리를 보완할 수는 있었죠. 도덕적 주장은 이런 식으로 전개됩니다.

 

정의에 대한 고민, 또 제가 보기에는 좋은 삶에 대한 고민과 함께 전개되죠. 그럼 이런 고민이 생깁니다. 자유주의자들이라면 이렇게 말하겠죠. ‘도덕과 종교에 대한 서로의 견해가 정의에 대한 견해와 분리할 수 없다면 의견이 다른 동료 시민을 존중하는 사회가 가능합니까?’

 

이런 존중의 방법은 우리가 각자가 수용하는 ‘존중’의 개념에 따라 달라집니다. 자유주의적 개념에서 동료 시민들의 도덕적, 종교적 신념을 존중한다는 건 정치적인 목적으로 그들을 소위 무시하는 겁니다. 그런 도덕적, 종교적 신념을 모른 척하고 회피하는 거죠. 상대를 자극하는, 그런 언급은 피하고 정치논쟁을 벌이는 겁니다. 하지만 이게 능사는 아닙니다. 최선책도 아니고요. 민주주의에 필수적인 상호존중을 이렇게만 해석하라는 법은 없죠. 다른 개념의 존중도 있습니다. 동료 시민의 도덕적, 종교적 신념을 회피하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경청하는 존중이죠.

 

때로는 반박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경청하고 배우기도 하는 존중입니다. 물론 도덕적, 종교적 경청과 적극적 몰입의 정치가 반드시 합의로 이어지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도덕적, 종교적 이견에 대한 올바른 평가로 이어지란 보장도 없죠. 그런 종교적, 도덕적 교리는 알면 알수록 싫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숙고하고 몰입하는 존중은 다원주의 사회에 더 적절하고 잘 맞는 존중인 것 같습니다. 도덕적, 종교적 이견은 인간의 선에 대한 궁극적 다원성의 반영인 이상 도덕적 몰입의 정치는 서로 다른 삶이 표출하는 독특한 선들을 더 올바르게 평가하도록 도와줄 겁니다. 13주 전에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저는 정치철학이 주는 쾌감을 언급하며 그 위험성도 지적했습니다. 정치철학이란 학문은 원래 그런 거니까요.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고 기정사실을 의심하게 하는 학문이죠.

 

그래서 경고했을 겁니다. 일단 익숙한 것들이 낯설어지면서 우리가 주변을 성찰하기 시작하면 결코 예전과 같을 수는 없다고요. 여러분도 지금쯤 이 불편함을 조금이나마 느끼셨기를 바랍니다. 이 불편함, 이 긴장이 우리를 비판적인 성찰과 정치적인 발전, 도덕적 삶으로까지 이끄는 원동력이니까요. 우리의 토론은 이제 끝이지만 어떤 의미에선 시작입니다. 처음에 ‘왜’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왜 이런 논쟁이 계속될까요? 아무리 논쟁은 해도 결론은 나지 않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런 질문들에 항상 답하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공적인 삶에서도 사적인 삶에서도 철학은 피할 수 없습니다. 철학이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요.

 

처음에 인용한 칸트를 재인용하면 회의주의는 인간 이성의 쉼터입니다. 흔들리는 교리들을 성찰할 순 있지만 이성의 영원한 안식처가 될 수는 없죠. 회의주의나 자기 위안에 안주하는 것은 칸트에 따르면 이성의 방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합니다. 이 수업의 목표는 이성의 방향을 일깨워 이성이 이끄는 곳으로 가보는 것이었는데 적어도 그 목적을 달성해 이성의 방황이 앞으로도 여러분을 부단히 괴롭힌다면 우리가 함께 이뤄낸 성과는 결코 작은 게 아닐 겁니다. 감사합니다.

 

* 저작권은 PBS / Harvard University에 있고, 번역은 EBS 방송에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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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특강 정의> 강의 내용 중 언급된 관련 도서입니다.

 

2강: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공리주의>

3강: 존 스튜어트 밀 <공리주의>

4강: 존 로크 <제2서한>

6강: 임마누엘 칸트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

7강: 임마누엘 칸트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 존 롤스 <정의론>

8강: 존 롤스 <정의론>, 밀턴 프리드먼 <선택할 자유>, <선택의 자유>

10강: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니코마코스 윤리학>

11강: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2강: 존 롤스 <정의론>

 

정의의 마지막 강의를 다 편집해 올려 놓으니 이제야 한결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 같습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 강의를 정리하고 들으면서 많은 것을 얻었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과연 '정의'가 이 사회에 제도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대한민국 사회에 제발 정의가 살아 숨쉬고 자리를 잡을 수 있기를 바라며 이만 저는 퇴장할까 합니다.  

출처 : 책을 벗 삼아
글쓴이 : 문화재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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