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하버드 특강 "정의" - 10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민정치
10강.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민정치
(The Good Citizen/Freedom vs. Fit)
<개요>
정치의 목적은 무엇인가?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현대정치철학의 주된 관심사가 소득과 재산, 기회의 공정한 분배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된 관심사는 공직과 명예의 분배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란 개인이 응당 받아야 할 몫을 주는 것, 개인에게 딱 맞는 역할을 찾아주는 것이다. 이런 합목적적 추론은 정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에게 정치의 목적은 시민의 미덕을 배양하는 것이고 국가와 정치공동체의 텔로스(목적)는 ‘행복한 삶’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폴리스에 살도록 정해진 존재이고 인간의 본성은 정치에 참여해 고유한 언어능력을 발휘할 때 완벽히 실현된다. 그럼 폴리스에서의 발언권, 정치권력은 어떻게 할당해야 할까? 최고의 공직과 명예는 누구에게 주어야 할까?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것은 바로 이 공동체의 목적에 가장 많이 공헌한 시민이다.
그런데 우리는 공동체의 목적, 사회적 행동의 목적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은 현대의 골프논쟁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선천적으로 다리에 혈액순환장애를 안고 있는 프로골퍼 케이시 마틴은 프로투어에서 골프카트를 사용하게 해달라고 PGA에 요청했다. PGA가 이 요청을 거절하자 마틴은 협회를 고소했고 이 사건은 대법원까지 간다. 골프의 목적은 무엇인가? 골프코스를 걷는 것이 골프의 필수요소인가? 여기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분배정의를 논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한 두 요소, 목적과 명예의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정치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한 삶’이다. 이 목적에 따라 개개인에게 딱 맞는 역할을 찾아주는 것이라면 개인의 권리나 선택의 자유는 없는 것일까? 내가 어떤 일에 가장 잘 맞는다고 해도 내가 그 일을 원치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제 옹호는 바로 이런 개인의 권리나 자유를 침해한 대표적 사례가 아닐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반박에 어떻게 대답했을까?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반론들을 살펴보고 칸트와 롤스로 대표되는 현대정치철학과의 차이점에 대해 알아보자.
<강의 내용>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살펴본 이유는 현대의 정의이론들과 비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현대엔 정의와 권리를 왜 도덕적 자격이나 미덕과 별개의 문제로 봤는지 알아보려고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칸트나 롤스와는 달리 정의란 사람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받았는가의 문제라고 했죠. 아리스토텔레스 정의론의 핵심은 정의와 권리의 문제를 논하기 위해서는 어떤 사회적 행동이나 제도의 텔로스 즉 목적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정의가 평등한 사람들에게 평등한 대상들을 할당하는 것이라면 어떤 의미에서 ‘평등’한 것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논의가 진전되겠죠?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은 ‘우리가 찾아야 한다’였습니다. 대상의 본질, 기본속성, 목적에 따라 분배가 결정되니까요. 가령 플루트의 경우 최고의 플루트는 최고의 연주자가 가져야 한다고 했죠? 최고의 플루트 연주자가 최고의 플루트를 가져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게 플루트 연주의 탁월함에 대한 예우이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플루트 연주자의 미덕에 대한 보상이기 때문이죠.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오늘 우리가 계속 토론할 주제인 사회제도나 정치실천의 문제에 관한 한 목적론적 사고를 완전히 배제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보통 윤리나 정의, 도덕적 논쟁은 목적을 빼고는 생각하기가 어려우니까요.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으로는 그런데 그의 주장이 얼마나 위력적인지 두 가지 사례를 통해 알아봅시다. 첫 번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장시간 토론했던 정치에 관한 문제입니다. 공직과 명예, 통치권은 어떻게 분배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토론이죠. 두 번째는 현대에 벌어진 골프 논쟁입니다. 장애를 가진 케이시 마틴이란 골퍼가 PGA에 골프 카트 사용을 요청했다가 거정당하자 PGA를 고소한 사건을 둘러싼 논쟁입니다.
법원, 마틴 카트사용 허용 판결
공식대회에서의 카트 사용여부를 놓고 미국프로골프협회(PGA)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장애인 골퍼 케이시 마틴이 승소했다.
토머스 코핀 연방 치안판사는 12일 오전(한국시간) "마틴 개인의 건강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보행(walking-only) 규정'만을 내세운 협회의 잘못이 인정된다"며 마틴은 PGA투어 대회에서 카트를 사용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코핀 판사는 그러나 이 판결로 모든 장애인 골퍼들이 PGA투어에서 카트를 사용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고 덧붙였다.
3시간 가량 계속된 재판에서 코핀 판사는 "18홀을 도는 동안 선수들이 걸어야만 한다는 규정은 물론 효력을 갖는다. 하지만 협회는 마틴에게 이 규정의 예외를 인정할 경우 공정한 경쟁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코핀 판사는 또 "건강상태로 보아 카트를 이용하더라도 마틴이 느끼는 피로도는 정상인 보다 훨씬 더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승소판결이 내려지자 재판정의 마틴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다 변호인을 향해 "우리가 이겼다"고 짧막하게 소감을 말했다.
소송에서 진 PGA의 밥 콤스 대변인은 판결에 불복, 항소할 뜻을 밝히면서도 "하지만 일단 법원의 판결로 우리는 마틴에게 카트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고 이를 이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연합뉴스 1998. 2. 12) |
정의를 논하는 두 사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사고방식을 심층적으로 잘 보여주죠.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텔로스, 즉 목적에 충실할 때 어떤 사회적 행동의 진정한 목적을 놓고 열띤 논쟁을 벌일 때가 있는데 그렇게 서로 의견이 충돌할 때 결정적인 견해차를 보이는 부분은 단지 누가 무엇을 가져야 하는가의 문제, 즉, 분배의 문제만이 아니라 명예의 문제도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의 어떤 자질이, 어떤 탁월함이 예우를 받아야 할까요? 텔로스, 즉 목적에 대한 논쟁은 명예 논쟁과 결부될 때가 많습니다. 이 말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론에 어떻게 드러나는지 봅시다.
오늘날 분배정의를 말할 때 우리의 주요 관심사는 수입과 재산, 기회의 분배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분배정의의 주요관심사는 수입과 재산이 아니라 공직과 명예였습니다. ‘누가 통치권을 가져야 하는가?’ ‘누가 시민이 돼야 하는가?’ ‘정치권력은 어떻게 분배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이었죠. 그는 이 질문에 어떻게 접근했을까요? 물론 목적론적으로 정의를 설명했겠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권력을 어떻게 분배할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정치의 목적, 요지, 텔로스를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정치학 (중판)
정치란 대체 무엇일까요? 그걸 아는 것이 왜 통치자 결정을 돕는 것이 되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정치란 선한 성품을 형성하기 위한 것입니다. 시민의 미덕을 배양하기 위한 것이죠. 행복한 삶을 위한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3권에 따르면 국가나 정치공동체의 궁극적 목적은 단지 생계활동이나 경제적 교환 치안유지만이 아니라 행복한 삶을 구현하는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란 이런 것이죠. 물론 걱정되는 면도 있을 겁니다. 정치의 목적이 그런 거라면 현대사상가의 정의론과 정치론이 옳다고 여기겠죠. 왜냐하면 칸트와 롤스만 봐도 정치의 핵심은 시민의 도덕성 형성, 즉 우리를 선하게 만드는 게 아니니까요.
우리 스스로 선함과 가치, 목적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존중하는 거죠. 그 밖의 모든 자유들까지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다릅니다.
"명목뿐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폴리스라면 선의 장려라는 목적에 몰두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정치 연합은 단지 동맹으로 전락한다. 폴리스 구성원들을 선하고 의롭게 만드는 삶의 방식이어야 할 법도 타인에 대항해 자신의 권리를 보증하는 단순한 계약에 머물고 만다. 폴리스는 같은 지역에 사는 주민들의 단순한 모임이 아니며 서로의 부정을 막고 원활한 교환을 하기 위한 모임도 아니다. 폴리스의 목적과 목표는 좋은 삶이며 사회 제도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폴리스의 목적이 바로 이 ‘좋은 삶’이라면 이 목적으로부터 분배정의의 원칙이 도출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합니다. 이 원칙에 따라 누가 발언권과 정치권력을 가장 많이 가져야 할지가 결정되는데 그 사람은 바로 선을 목적으로 하는, 이 정치 연합에 제일 공이 큰 사람이죠. 폴리스에 제일 공헌을 많이 한 사람에게 더 큰 통치권과 명예가 주어지는 이유는 바로 그 사람이 그 위치에 있어야 정치공동체의 기본취지에 가장 많이 공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식으로 정치의 목적에서 시민권과 정치권력의 분배원칙을 도출해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주장을 했을까요? 왜 정치적인 삶, 정치참여가 좋은 삶을 사는데 어떤 식으로든 필수적이라고 했을까요? 정치에 참여하지 않으면 왜 사람들이 완벽하게 좋은 삶, 반듯한 삶, 도덕적인 삶을 살 수 없다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두 가지라고 했는데 그 대답의 일부가 미리 제시된 <정치학> 1권의 내용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폴리스에 살면서 정치에 참여해야만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완벽하게 실현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본래 폴리스에 살도록 정해진 존재라는 데, 왜 그럴까요? 정치적인 삶을 살 때만 우리 인간의 고유한 언어능력을 실제로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죠. 아리스토텔레스가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를 판별하는 능력으로 본 언어능력 말입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1권에서 ‘폴리스, 즉 정치공동체는 애초부터 개인에 우선’한다고 했습니다.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목적에서 폴리스가 우선하는 이유는 인간이 정치공동체를 떠나 혼자 살아가는 자족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죠.
"고립된 인간, 즉 이미 자족적이라 정치 연합의 이익을 나눌 수 없거나 나눌 필요가 없는 인간은 짐승이거나 신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우리 인간이 본성을 완전히 실현하고 우리의 능력을 완전히 펼치는 건 언어능력을 발휘할 때뿐이라고 합니다. 즉, 다른 사람들과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에 대해 토론할 때뿐이라는 거죠. 그런데 왜 인간은 유독 정치공동체에서만 언어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했을까요? 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두 번째 대답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 부분은 미리 읽어왔죠? 그 부분에 나온 대답은 정치적인 심사숙고, 시민의 삶을 사는 것, 교대로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지배의 공유, 이 모든 것이 미덕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이란, 고통보다 쾌락이 큰 상태를 극대화하는 게 아니라 ‘미덕과 일치하는 영혼의 활동’입니다. 모든 정치 문하생이 영혼을 연구해야 하는 이유도 영혼을 형성하는 건 좋은 도시가 법률을 제정하는 목정 중 하나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도덕적인 삶을 살려면 왜 꼭 좋은 도시에 살아야 할까요? 훌륭한 도덕원칙들은 그냥 집에서 배우거나 철학수업이나 도덕책에서 배우면 안 될까요? 그런 원칙이나 규칙, 수칙에 따라 살면 그뿐 아닌가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미덕은 그런 게 아니라고 합니다. 미덕은 실천을 통해서만, 연습을 통해서만 습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터득하는 것이지 책으로 배우는 게 아닙니다. 플루트 연주와 같다고 보면 되는데 악기 다루는 법도 책만 봐서는 안 되고 연습을 하고 다른 사람 연주도 들어봐야 늘잖아요? 이런 식으로 연습해야 익히는 기술 중엔 요리도 있죠. 요리책만 보고 요리하는 법을 배워 일류요리사가 된 사람은 없을 겁니다. 요리도 직접 해봐야 늘죠. 농담도 아주 좋은 사례인데 농담 잘하는 법에 관한 책만 읽고 유명한 코미디언이 된 사람은 없잖아요? 책만으로는 왜 안 될까요? 농담과 요리, 악기연주엔 어떤 공통점이 있기에 그럴까요?
어떤 공통점 때문에 책이나 강연에서 배운 가르침과 규칙만으로는 안 되는 걸까요? 그건 바로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이 능숙함의 문제이기 때문인데 요리나 악기연주, 농담을 능숙하게 잘한다는 건 무슨 뜻이죠? 특수한 상황을 잘 식별해낸다는 거죠. 어떤 규칙이나 가르침도 코미디언이나 요리사, 훌륭한 음악가한테 특수한 상황을 잘 식별하는 습관을 길러주지는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덕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이걸 정치에 연결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좋은 삶에 필수적인 미덕을 쌓는 길은 오직 연습뿐입니다. 연습으로 습관을 들이는 거죠. 그런 다음 시민들과 선의 본성에 대해 심사숙고 하는 행위에 몰입하는 겁니다.
정치란 궁극적으로 그런 것입니다. 동등한 시민들끼리 심사숙고하는 시민의 미덕을 습득하는 건데 이런 것들은 정치를 떠나 혼자 살 때는 습득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본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정치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래서 페리클레스처럼 시민으로서의 자질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 최고의 공직과 영광을 누려야 하는 거죠. 공직과 영광의 분배는 이렇게 목적론적 성격을 띠면서 명예의 문제로 다뤄지기도 합니다. 페리클레스 같은 사람을 예우하는 것도 그것이 정치의 요점이기 때문이죠. 단지 페리클레스가 현명한 정책을 실행해 시민들을 위한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 내는 판단력을 가졌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네 맞습니다. 그것도 중요하죠.
하지만 페리클레스 같은 사람이 최고의 기준이 되는 더 큰 이유, 폴리스의 공직과 명예, 정치권력과 영향력을 가장 많이 갖는 이유는 시민의 미덕을 소유한 사람들을 가려내 예우하는 것이 정치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의 경우, 시민의 덕목, 시민의 탁월함, 실천적 지혜를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정치에 명예의 문제를 결부 시킵니다.
한 가지 사례를 통해 이런 식의 결부가 지금 어떻게 논란이 되는지 알아보죠.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결부는 지금도 적용될 수 있으니까요. 한편으로는 정의와 권리를 둘러싼 논쟁에 또 한편으로는 사회적 행동의 목적, 즉 텔로스를 둘러싼 논쟁에 말입니다. 이런 결부는 케이시 마틴의 골프 카트 사용을 둘러싼 논쟁에도 적용됩니다. 사회적 실천이나 운동경기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일 때도 어떤 자질을 포상해야 하는가를 놓고 논쟁을 벌일 때도 분배정의의 목적을 따질 때도 명예의 분배원칙을 따질 때도 그렇습니다.
케이시 마틴이 누구죠? 아주 훌륭한 프로 골퍼입니다. 그는 수준 높은 골프경기를 보여줬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다리에 희귀한 혈액순환장애가 있어서 걷는 게 아주 힘들었을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했죠. 그래서 미국프로골퍼협회 PGA에 요청을 했습니다. 자기가 프로토너먼트에 출전할 때 골프 카트를 쓰게 해달라고요. PGA가 거절하자 그는 미국 장애인법에 따라 협회를 고소했고 이 사건은 대법원까지 갔습니다. 대법원은 이런 질문에 답해야 했습니다.
케이시 마틴에게는 권리가 있을까요? PGA는 그가 골프 카트를 타고 경기하는 걸 허락해야 할까요? 도덕적인 관점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케이시 마틴이 골프 카트를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 이번엔 토너먼트에서 골프 카트 사용을 허락해선 안 된다는 분? 대다수가 케이시 마틴의 권리에 동조했고 의미 있는 소수의 반대도 있었는데 먼저 반대하는 입장부터 들어볼까요? PGA가 왜 그에게 골프 카트를 제공해서는 안 될까요?
- 말씀하세요.
- 골프도 하나의 스포츠이고 현재 코스를 걷는 게 경기의 일부처럼 됐습니다. 그것도 골프의 고유한 특징인데 코스를 걸을 수 없다는 건 프로로서 경기에 필수적인 요소를 수행할 수 없다는 뜻 아닐까요?
- 좋습니다. 잠깐 서 있고 이름이 뭐죠?
- 토미요.
- 토미도 골프를 치나요?
- 그냥 흉내만 좀 냅니다.
- 이 중에 혹시 진짜 골퍼는 없나요?
- 못 쳐서 죄송합니다.
- 아뇨.
-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혹시 골프 팀원 없나요? 학생? 이름하고 생각을 말씀하세요.
- 제 이름은 마이클이고 저는 주로 카트를 타기 때문에... 별로 할 말이 없는데요.
- 그래서 마지 못해 손들었군요.
- 네.
- 좋아요. 그래도 방금 토미가 한 말에 대해 물어봐도 되겠죠? 적어도 프로라면 코스를 걷는 게 경기에 필수적이라는 말에 동의합니까?
- 네, 그럼요.
- 그런데 왜 카트를 타죠? 그러고도 골퍼라고요? 농담이고, 왜 그게 필수적이죠?
- 코스를 걸으면 더 힘이 들고 경기력에도 큰 차이가 나니까요.
- 그래요? 좋아요. 마이클과 토미는 계속 서 있고 골프 카트를 탈 권리가 있다는 의견도 들어보죠. 왜죠? 그 입장을 지지하시는 분? 말씀하세요.
- 전 PGA가 골프카트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봅니다. 이 문제에서 중요한 건 그 사람도 얼마쯤은 걷는다는 거죠. 카트로는 못 가는 데도 있으니까요. 그 얼마쯤은 걷는데도 건강한 선수보다 더 큰 피로를 느낄 테니까요. 여전히 정상인보다 불리한 거잖아요.
- 이름이 뭐죠?
- 리바입니다.
- 리바 코스를 걷는 게 경기에 필수적이란 토미의 지적은 어떤가요? 그런 NBA에 코트를 뛰어다니지 않는 장애인도 참가할 수 있다는 말 같은데요?
- 두 가지를 지적하고 싶은데 첫째는 걷기가 필수가 아니란 거죠. 대부분 카트를 타지 않아도 취미로 골프를 칠 때나…
- 마이클처럼요?
- 네 어떤 대회는 카트를 타죠. 시니어 PGA투어, 나이키투어, 대학경기도 PGA투어처럼 수준 높은 대회들이지만요. 그러니까 골프에서 걷기가 중요하다는 논리는 일관성없는 상황윤리죠. 그렇다고 아예 안 걷는 것도 아니고 공을 칠 땐 서서 하잖아요.
- 좋습니다. 또 다른 분? 말씀하세요.
- 원래 경기의 목적은 순위를 가리기 위한 거잖아요. 전국대회라면 왕 중 왕을 가리는 건데 중요한 건 경기의 목적이고 그 목적을 위해서라고 규칙을 바꾸면 안 되죠.
- 걷기도 그 목적에 포한된다는 건가요?
- 네.
- 토마스처럼 필수라는 거군요? 이름이 뭐죠?
- 데이비드요.
대법원은 PGA가 케이시 마틴의 요청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판결했는데 그 이유는 방금 리바가 말한 대로 코스 걷기가 골프의 필수요소가 아니라고 봤기 때문이죠. 판결문에 따르면 코스를 걸을 때 소모되는 칼로리는 햄버거보다 적으며 코스 걷기가 필수는 아니라고 합니다. 다수의 의견은 그랬지만 스캘리아 판사는 반대했고 데이비드와 같은 입장에서 말했습니다. 골프의 필수요소를 알아내는 건 법정이 할 일이 아니라고 했죠. 골프는 엄밀히 말해 재미를 위한 경기이고 그런 식의 경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면 된다고요. 사람들이 흥미를 느껴 TV방송으로 보고 싶어 할지 말지는 시장이 결정할 일이라며 스캘리아 판사는 반 아리스토텔레스 적으로 반대한 겁니다.
이 논쟁은 두 측면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골프의 진정한 본질, 목적, 텔로스에 걷기가 포함되는가 하는 질문일 겁니다. 물론 이 뒤엔 불편한 속사정이 감춰져 있죠. 걷기 여부는 골프가 진짜 운동경기라는 걸 보여주는 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가만히 있는 공을 홀컵에 넣는 경긴데… 농구, 야구, 축구처럼 골프도 운동경기일까요? 아니면 당구 같은 걸까요? 당구도 가만히 있는 공을 망가진 몸매로도 넣기만 하면 되니까 기술은 기술이되 운동기술은 아니죠. 혹시 골프를 잘 치는 프로골퍼들이 골프가 운동경기로 인정받지 못하고 명예가 추락할까봐 우려한 건 아닐까요?
당구 같은 기술경기처럼 취급될까 봐요. 만일 그렇다면 방금 우리가 했던 논쟁처럼 목적에 대한 논쟁이자 명예에 대한 논쟁이죠. 골프란 경기가 어떤 미덕을 예우하고 인정하는가 하는 명예의 문제이니까요. 아리스토텔레스에 주목해야 하는, 이 두 가지 질문은 다음에 계속 토론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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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엔 케이시 마틴이 PGA 대회에서 카트를 탈 권리가 있는지 토론했습니다. 이 논쟁이 어떻게 벌어졌고 정치철학 상 어떤 차이가 있는지 환기해 봅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을 규정하는 한 가지 특징은 목적론적 접근이었죠? 권리를 정해주려면 먼저 문제가 되는 사회적 행위의 목적을 이해해야 한다고 했으니까요.
아리스토텔레스 정의론의 또 다른 특징은 정의를 합목적성의 문제로 본다는 겁니다. 개인의 미덕이나 탁월함이 적절한 역할에 딱 맞는가를 보는 거죠. 오늘은 케이시 마틴의 골프 카트 사용권에 대한 토론을 마치고 아리스토텔레스를 논할 때 반드시 지적되는 노예제도의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케이시 마틴의 요청은 정당했을까요? 토너먼트 경기의 본성상, 그 목적상 수용해야 할까요? 골프 카트 사용을 허락하지 않는 게 장애인 차별이란 주장도 있을 테고 혼자만 카트를 타면 코스를 걷느라 지치고 숨찬 다른 골퍼들에게 부당하다는 주장도 있을 겁니다. 여기까지 토론했죠? 공정성에 대한 이 주장은 어떤가요?
- 말씀하세요, 제니.
- PGA는 왜 모든 골퍼에게 카트 사용 선택권을 안 줄까요? 수업자료를 읽어보니 PGA 대회 말고도 카트 사용을 금지한 골프대회는 많던데 카트 사용을 허락하고 장려하기까지 하는 시니어 토너먼트처럼 PGA도 그냥 허락하면 안 될까요?
- 그냥 다 사용하게 하자 그런 건가요?
- 선택권을 주고 결정하게 하는 거죠. 전통을 중시하는 사람은 카트를 탄 사람보다 지친다는 걸 알지만 걷는 걸 택할 수 있게요.
- 네, 제니의 해결책은 어떤까요? 공정함을 위해서 캐이시 마틴만 유리하게 할 게 아니라 카트를 타는 게 그렇게 유리하다면 원하는 사람은 다 타게 하자는 건데 이 해결책에 모두 만족하십니까? 이 딜레마 전체가 해결될까요? 제니의 의견에 반대하는 분? 말씀하세요.
- 지난 시간에도 나온 얘긴데 그렇게 하면, 모두 카트를 타게 하면 대중이 원하는 골프의 정신을 훼손시키는 거 아닐까요? 그렇게 하면 경쟁조건은 같아지겠지만 교수님의 지적처럼 운동경기로서의 성격이 퇴색하니까요. 그건 다른 경기에서도 마찬가진데 가령 수영에서 어떤 사람이 오리발을 차고 싶어 한다고 다 차게 하자는 소리나 마찬가지죠.
- 올림픽 수영종목에서 다 오리발을 차게 한다… 이 문제는 제니가 답하는 게 좋겠죠? 다의 말은, 올림픽 수영종목에서 오리발 착용을 원한다고 다 차게 하면 그 정신을 훼손한다는 건데 제니의 생각은 어떤가요? 스포츠정신 훼손이라는데요?
- 골프에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 때문에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실력 있는 골퍼가 경쟁을 못 한다면 그것도 골프 정신 훼손 아닐까요? 골프의 요지는 클럽으로 홀컵에 공을 넣는 건데, 물론 전 골퍼는 아닙니다. 이게 제가 보는 골프의 요지란 거죠. 케이시 마틴의 PGA 소송 판결문에도 골프의 핵심은 코스 걷기가 아니라 클럽으로 스윙하는 거라고 했으니까요.
- 네, 다의 의견에 대한 제니의 답변은 코스 걷기가 필수는 아니란 건데 그럼 다시 목적의 문제죠?
- 휠체어 농구대회처럼 팔만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위한 대회는 따로 있잖아요.
- 네, 마이클의 생각은 어떤가요?
- 휠체어 농구대회에도 다른 선택권은 없는데 왜 PGA투어만 다른 선택권을 줘야 하죠? PGA 투어도 최고를 가리는 경기인데 경기수행자격을 요구하는 건 당연하죠.
- 네, 마이클은 케이시 마틴한테 장애인을 위한 특수올림픽도 있으니 장애인골프대회에 출전하라는 거군요?
- 네. 코스 걷기도 골프의 일부이니 케이시 마틴이 코스를 걸을 수 없다면 출전을 말아야죠.
- 네, 의견교환 감사합니다.
이 논의에서 어떤 점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에 연결되죠? 코스 걷기도 골프의 일부인가? 네, 하나는 걷기가 골프에 필수적인 부분인가 하는 거고 또 하나는 PGA가 존중해야 할 권리를 케이시 마틴이 갖고 있는가 여부입니다. 이 질문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 말처럼 논점과 해결책이 달라지니까요. 즉, 걷기가 골프경기에 필수적인가의 여부가 이 사건의 첫 번째 논점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으로 보자면 두 번째 논점도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다른 사상가와 다른 이 두 번째 논점은 바로 명예의 문제입니다.
케이시 마틴도 최고의 토너먼트 승리자란 명예를 얻으려고 카트 사용을 청한 거니까요. 그런데 왜 그랬을까요? 증인으로 채택된 잭 니클라우스나 톰 카이트 같은 유명 프로골퍼들은 수업자료에 따르면 왜 카트 사용에 반대했나요? 제니의 말처럼 카트를 다 사용하게 하자고 하면 이들도 격분했을 것 같은데 이건 다가 지적한 문제 때문입니다. 좀 점잖게 표현하자면 프로골퍼들은 극도로 예민하다는 겁니다. 골프가 진짜 운동경기인지 아닌지에 관해서 말이죠.
원하는 사람은 다 카트를 타게 하면 좀 더 확실해지니까요. 보는 사람에 따라 아닐 수도 있지만 골프는 진짜 운동경기가 아니라 단지 기술경기라는 게 확실해진다는 거죠. 따라서 골프의 본질을 따지는 목적론적 논쟁뿐 아니라 골프의 본질에서 파생된 필수요소에 대한 논쟁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명예 논쟁과 결부될 수밖에 없습니다. 골프의 목적이 관중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것만은 아니니까요. 스캘리아 판사의 생각이 틀린 거죠.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는요.
골프는 오락거리를 제공해 대중을 즐겁게 할 목적으로 단순히 재미로만 하는 게 아니라 특정한 운동기량을 예우하고 보상하며 인정하기 위한 겁니다. 적어도 최고의 명성을 얻은 골퍼들한테 이런 시각을 지켜내는 건 중요한 일이죠. 물론 스캘리아 판사 같은 입장을 취하는 사람은 뭐 이런 얼토당토않은 걸 묻느냐고 할 겁니다. 대체 왜 미국대법원이 골프의 본질에 대한 판단력을 갖추고 판결을 해야 하느냐는 거죠. 이게 스캘리아 판사의 입장인데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스캘리아 판사도 운동경기의 본질을 봤지만 아리스토텔레스와는 정반대로 봤기 때문이죠.
“경기란 원래 재미를 빼고는 아무 목적도 없는 것이다.(그것이 경기와 생산적 활동의 차이다.)” - 인터니 스캘리아 판사 -
스캘리아 판사가 말하기를, ‘그것이 바로 경기와 생산적 활동의 차이다.’ 어떤 종목을 좋아할지 안 봐도 뻔하죠? 그래서 어떤 경기에서 임의로 정한 규칙이 본질적인지 판단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한술 더 떠서 마크 트웨인이 골프 비하 발언까지 인용했죠.
“걷기를 골프의 핵심으로 보는 사람은 많다. 오죽하면 마크 트웨인이 ‘그게 걷는 거면 걷기 운동 다 죽었네’라고 했겠는가?” - 엔터닌 스캘리아 판사 -
스캘리아 판사가 게임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한 이유는 게임에서 제기되는 권리와 공정성 논란을 파악하지 못한 이유는 게임, 스포츠, 운동경기를 재미를 위한 것으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공리적인 활동으로만 본다는 거죠.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포츠를 단지 재미로만 보지 않습니다. 진정한 스포츠, 진정한 운동경기는 평가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거죠. 스포츠를 챙겨 보고 염려하는 관계자들은 이 사실을 압니다. 다시 말해 스포츠와 단순한 구경거리엔 차이가 있다는 거죠. 즉, 스포츠는 어떤 탁월함, 어떤 미덕을 요구하고 예우하며 포상하는 행위입니다.
그런 미덕을 높이 사는 사람이 진짜 안목 있는 팬이죠. 이들에게 스포츠 관람은 단순한 재미가 아니기 때문에 스포츠의 기본정신을 둘러싼 논쟁이 항상 일어나는 겁니다. 법정이 어떤 판결을 내리든 항상 이런 논쟁은 있을 수 있다는 거죠. PGA도 내부적으로 이 논쟁을 파악했기 때문에 자기들 관점이 공격당할까 봐 그토록 걱정하는 거니까요. 걷기와 노력, 피로는 골프에 부차적인 게 아니라 필수적이라는 관점을 유지하려고요.
지금까지 한 얘기를 정리하면 권리 논쟁에는 목적과 명예의 문제도 결부돼 있다는 거죠.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를 논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한 두 가지가요. 그럼 이제 모두 생각해 봅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이 옳은지 아닌지 설득력이 있는 없는지 어느 정도 판단이 섰을 겁니다. 이 정의론이 옳다면 아주 확실하고 중요한 반대에 부딪힐 겁니다. 정의가 개인을 어떤 역할에 맞추는 거라면 미덕에 맞게 명예와 인정을 안겨주는 거라면 그런 게 정의라면 자유가 개입할 여지가 있나요?
이게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정의론에 가장 강력한 반박일 겁니다. 어떤 사회적 역할이 나에게 딱 맞거나 적합하다고 해도 내 사회적 역할, 내 삶의 목적을 나 스스로 결정할 권리는 어디로 갔죠? 목적론이 자유에 어떤 여지를 남기나요? 사실 그래서 롤스도 목적론적 정의론을 거부했죠. 그 이유는 목적론적 정의론이 시민의 기초적 평등권을 위협한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맞는지 알아봅시다. 특히 그의 목적론적 정의론이 자유와 상충하는지 알아보자는 겁니다. 확실히 이런 걱정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제 옹호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시 아테네에 존재했던 노예제를 옹호했습니다. 어떤 말로 노예제를 옹호했을까요? 노예제가 정당하려면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필수적이어야 한다는 건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적어도 당시 사회에서 노예제는 필수적이라고 했죠. 왜 필수적일까요? 시민들이 그런 단순하고 비천한 가사노동에 풀려나 회합에 참가해 정치문제를 심사숙고하려면 그런 비천한 작업, 단순한 생계유지활동을 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문제는 공상과학에서처럼 기술적인 해결책이 발명되지 않는 한 어렵고 고된 육체노동을 대신할 사람이 있어야 시민들이 선데 애해 심사숙고하고 인간의 본성을 실현한다는 거죠.
따라서 노예제도는 필수적이라고 합니다. 시민들의 자유로운 폴리스 생활을 위해서요. 시민들의 숙고와 논쟁, 실천적 지혜를 위해서죠. 그보다 더 중요한 충족조건은 노예제도는 그 공동체 전체가 기능하는데 필수적인 경우 외에 이럴 경우에도 정당하다고 합니다. 합목적성이라는 기준 알죠? 바로 노예가 되는 게 공정하고, 딱 맞고, 적절한 사람이 있을 때도 정당하다고 합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도 노예제가 정당하려면 이 두 조건이 다 맞아야 한다고는 합니다.
그는 이렇게 탄식하면 말했죠.
“사실인데 어쩌겠는가? 본성상 노예에 딱 맞는, 노예로 타고난 사람이 있을 것을! 육체와 영혼이 다른 것처럼 일반인들과 다른 이 사람들은 지배받도록 정해져 있다. 이들은 노예가 되는 게 그 천성을 가장 잘 발휘하는 것이다. 남들에게 설명을 들을 순 있지만 결정에 참여할 수도 실천할 수도 없다.”
어쨌든 이것만은 확실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게 얼마나 비겁하고 어색한 주장인지 알았던 게 분명합니다. 비판자들이 지적할 만할 점을 금방 시인했으니까요. 비판자들은 아테네에 노예로 사는 사람이 많다는 걸 지적했거든요. 노예로 타고난, 노예에 딱 맞는 사람이 아닌데도 전쟁에서 패해 포로로 잡혀왔다는 이유 만으로요. 아리스토텔레스도 인정한 것처럼 고대 아테네에서 자행된 노예제는 노예에 타고난, 노예에 딱 맞는 사람만 노예였던 건 아니었습니다. 운수가 사나워 전쟁에서 포로로 접혀온 노예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도 변명하길, 시민들을 위해 노예제를 인정하더라도 노예로 부적절한 사람이 노예 역할을 맡는 건 부당하다고 했습니다.
그 일에 맞지 않는 사람에게 노예제는 강요란 걸 인정한 거죠. 노예제가 강요라 잘못인 게 아니라 잘못일 때 부자연스럽게 강요하니까요. 누구한테 어떤 역을 강요한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이 그 역에 안 맞는다는 뜻이니까요. 아리스토텔레스도 인정했습니다. 왜 이런 말을 했느냐 하면 노예제를 옹호했다고 그의 논리 전체가 잘못된 건 아니기 때문이죠. 개인에게 딱 맞는 역할을 찾아주는 정의론 자체의 잘못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노예제의 조건을 말한 것도 자기 이론을 현실에 적용할 때 혹시 모를 잘못을 완벽하게 잡기 위해서였으니까요.
자유를 내세우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제기된 더 큰 반론을 살펴보기 전에 여러분 생각을 들어볼까요? 아리스토텔레스의 합목적성으로서의 정의, 정의에 대한 목적론적 추론, 권리와 분배정의에 있어서 명예의 문제에 대한 생각을요. 플루트와 정치, 골프 문제를 다룰 때 얘기한 것들이죠?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이해가 안 된다거나 전반적으로 그의 말에 반대하는 분?
- 말씀하세요.
- 제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반대하는 이유는 개인을 역할에 묶는다는 건데 해적처럼 걷고 해적처럼 말하면, 해적이 돼야 하고 그게 옳다는 거잖아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이 이상하고 모순돼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겁니다. 해적처럼 걷고 해적처럼 말하면 투자은행직원이 돼선 안 된다는 거죠. 원래 그런 일에 맞지 않는 사람이니까요. 의족이랑 안대를 하고 태도가 불량하면, 바다에 나가 해적선을 타야 하고요.
- 그 말은 전혀…
- 누가 이러지 않던가요?
- 학생 말처럼 그 두 직업이 확실히 다른 직업은 아니라고 네, 좋은 지적이고 요지는 알겠습니다. 다른 학생? 말씀하시죠.
- 개인의 권리가 무시되는 것 같아요. 제가 세상에서 제일 완벽한 경비원이라 누구보다 효율적으로 경비를 선다 해도 제가 그 일이 싫다면요? 다른 꿈이 있을 수도 있고 그 일이 영 내키지 않는다면요?
- 좋습니다. 이름이 뭐죠?
- 메리 케이트요.
- 좋아요. 다른 의견도 들어보죠. 말씀하세요.
- 골프 카트에 대한 논쟁을 환기해 보면 제가 이 목적론적 추론 방법에 반대하는 주된 이유는… 마이클이었나요, 이름이?
- 네.
- 마이클은 걷는 것도 골프의 본질적인 부분이라지만 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런 문제를 아무리 오래 붙들고 토론한다고 해도 합의에 도달할 것 같진 않습니다. 목적론이라는 틀 안에 갇히면 어떤 합의도 불가능해 보이거든요.
- 네, 이름이 뭐죠?
- 패트릭이요.
패트릭 좋아요. 그럼 이 비판들을 다 같이 해결해 봅시다. 패트릭부터 시작해 볼까요? 중요한 지적이었죠? 걷기가 골프에 필수적인가를 놓고도 사소할지라도 조심스러운 반대는 있었는데 하무며 더 큰 문제는 어떻겠냐는 거죠. 정치공동체의 기본강령을 논할 때처럼 각자의 이해가 더 많이 걸린 문제는요. 우리 공동체의 삶을 규정하는 목적이나 선이 무엇인지를 놓고도 의견이 갈린다면 그 목적이나 선을 규정하는 개념들로 어떻게 정의와 권리를 논하느냐는 거죠. 중요한 지적입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현대정치철학은 시작부터 이런 선에 대한 의견 불일치를 고려한 겁니다. 그래서 도달한 결론이 바로 정의와 권리, 헌법은 특수한 정치적 이해관계를 반영해서는 안 된다는 거였죠. 그 대신 사람들이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권리의 기본 틀만을 제공하자는 겁니다. 자기의 선과 목적을 직접 선택하게요.
이번엔 메리 케이트의 지적인데 경비원처럼 아무리 그 역할에 딱 맞는 사람일지라도 더 좋은 직업, 다른 삶을 원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했죠? 이것도 역시 자유에 관한 문제죠? 남들이 내 천성이라고 하는 역할로부터 나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적어도 그 역할에 대한 결정권은 우리한테 있어야 하지 않나요? 우리한테 맞는 역할을 정하는 건 우리한테 달린 일 아니었던가요? 여기서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칸트, 롤스와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죠. 칸트와 롤스는 패트릭이 옳다고 할 겁니다.
다원주의 사회에선 좋은 삶의 본질을 놓고 서로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으므로 각자가 생각하는 답이 정의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거죠. 이들은 목적론을 거부합니다. 정의를 선이란 개념에 결부시키는 걸 반대하죠. 목적론을 논할 때 칸트나 롤스의 추종자들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이겁니다. 정의를 선이라는 특정한 개념에 결부시키면, 개인과 그 역할의 접점을 찾는 문제로 보면, 자유가 들어설 여지가 없는데 자유롭다는 건 우리 부모나 사회로부터 전수됐을지도 모를 그 어떤 역할이나 전통, 풍습에도 얽매이지 않는 걸 말하죠.
이 거대한 철학적 전통들 사이에서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옳은지 칸트와 롤스가 옳은지를 정하려면 첫째로 우리가 탐문할 주제는 ‘권리는 선에 우선하는가?’일 것이고 둘째는 ‘자유인, 자유로운 도덕의 주체가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일 겁니다. 자유는 내가 나의 역할, 목적을 대면할 때 나에게 선택의 주체가 될 것을 요구하는가? 아니면 내 진정한 본성을 알아내는 주체가 될 것을 요구하는가? 이 문제는 다음 시간에 계속 얘기해 보죠.
* 저작권은 PBS / Harvard University에 있고, 번역은 EBS 방송에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사용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