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하버드 특강 "정의" - 9부 소수집단우대정책
9강. 소수집단우대정책
(Arguing Affirmative Action/What's the Purpose?)
<개요>
지난 시간에 토론한 소득과 재산에 있어서의 분배정의에 이어 이번 시간에는 교육과 입학, 입사 기회에 있어서의 분배정의에 대해 알아보자. 셰릴 홉우드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고등학교와 전문대를 자력으로 졸업하고 텍사스 주립대학 로스쿨에 지원했지만 탈락했다. 홉우드는 시험성적이나 졸업평점이 자기와 같은 소수인종은 합격한 반면, 자기는 백인이란 이유만으로 탈락했다며 1996년 텍사스 로스쿨을 고소했다. 셰릴 홉우드가 백인으로 태어난 것은 자기 잘못이 아닌데, 또 과거 조상들이 저지른 잘못은 자기가 한 일이 아닌데 소수집단우대정책의 희생양이 된 것인가? 아니면 상대적으로 열악한 교육환경에서 백인보다 학업성취도가 낮을 수밖에 없는 소수인종의 경우 같은 점수라도 그 잠재력에 가산점을 매겨 불평등을 바로 잡는 것이 옳은가? (시정 논리) 또는 노예제도나 인종차별 같은 과거의 잘못으로 불리한 입장에 놓인 소수인종은 교육여건의 불평등에 상관없이 보상해야 하는가? (보상 논리) 그것도 아니면 다양성 증진이라는 대학의 사명에 따라 소수집단우대정책을 지지해야 할까? (다양성 논리) 이 사명 때문에 개인의 권리가 침해당한 것은 아닌가? 대학의 사명은 대학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인가? 소수집단우대정책을 둘러싼 열띤 토론을 살펴보자.
현대철학이 기존 철학과 구분 되는 결정적인 차이는 분배정의를 도덕적 자격에서 분리한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자유지상론자도 존 롤스 같은 평등론자도, 칸트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분배정의를 다른 관점에서 본 철학자도 있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란 그 목적에 가장 잘 맞는 사람이 응당 받아야 할 몫을 주는 것이다. 가령 제일 좋은 플루트는 돈이 많은 사람이나 신분이 높은 귀족, 잘생긴 사람이 아니라 플루트를 제일 잘 부는 연주자에게 돌아가야 한다. 플루트의 존재이유, 목표, 목적, 즉 텔로스가 바로 연주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제일 좋은 테니스 코트 사용권도 돈 많은 사람이나 거물, 위대한 과학자가 아니라 테니스를 제일 잘 치는 선수에게 돌아가야 한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정의란 개인의 덕목에 딱 맞는 역할을 찾아주는 것이다. 소수집단우대정책을 둘러싼 논쟁 역시 대학의 사명, 대학의 목적이 자의적으로 정할 수 없는 정의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추론을 언급할 수 있다.
<강의 내용>
지난 시간에는 롤스가 구분한 두 가지 형태의 권리주장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봤습니다. 하나는 ‘도덕적 자격’에 따른 권리주장이고 또 하나는 합법적 권리에 따른 권리주장이었죠. 롤스는 이 둘을 혼동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분배정의는 도덕적 자격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미덕에 따라 포상하는 문제는 아니라는 거죠.
오늘도 이 도덕적 자격과 분배정의의 관계를 생각해 볼 텐데 오늘은 수입과 재산이 아니라 채용결정이나 입학기준 같은 기회의 분배정의입니다. 소수집단우대정책 사례를 통해 살펴봅시다. 셰릴 홉우드 소송사건은 다 읽어왔죠?
텍사스 주립대학 법학전문대학원 지망생이었죠. 셰릴 홉우드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혼자 힘으로 고등학교는 물론 지방 전문대와 새크라멘토에 있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학사과정을 마쳤습니다. 이때 졸업 평점은 3.8점이었죠. 그 뒤 텍사스로 이사해 법학전문대학원 입학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텍사스 주립대학 법학전문대학원에 지망했지만 결국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텍사스 주립대학이 소수 집단을 우대하는 입시정책을 썼기 때문이죠. 인종적, 민족적 출신배경을 반영하는 정책이었죠. 텍사스 주립대학의 말에 따르면 텍사스 인구의 40퍼센트는 아프리카계나 멕시코계 미국인인데 법학전문대학원으로서 다양한 학생층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앞으로도 학부졸업성적과 입학시험성적뿐 아니라 출신 인종이나 민족 같은, 인구 구성비를 고려한 입시정책을 펴겠다고 했습니다. 홉우드가 불평한 것처럼 이런 정책을 실시한 결과 텍사스 법학전문대학원 응시생 중 학부 성적과 입학시험성적을 포함한 총점이 홉우드보다 낮은 학생들은 붙고 홉우드는 떨어졌습니다. 홉우드는 자기가 백인이라서 떨어졌다며 항의했죠. 자기가 소수 집단이었다면 그 졸업 평정과 시험성적으로도 합격했을 텐데 말입니다. 이 소송에 제출된 입시통계자료를 보면 근거 없는 주장은 아닙니다. 같은 해에 지망한 아프리카계와 멕시코계 학생 중에 학부 성정과 입학시험점수가 홉우드와 같은 학생은 합격했거든요. 이 사건은 연방법원으로 갔습니다. 자, 법이 아닌 정의와 도덕이란 측면에서 이 일이 공정한지 부당한지 생각해 봅시다.
셰릴 홉우드의 항의는 정당한 주장인가요? 홉우드라는 개인의 권리가 대학의 입학정책에 침해당한 겁니까? 법학전문대학원 편을 들고 싶은 분? 인종과 민족성을 고려한 입시정책을 지지하면 손들어주세요. 셰릴 홉우드 편에서 개인의 권리가 침해당했다는 분? 거의 반반이군요. 그럼 셰릴 홉우드가 옳다는 의견부터 들어볼까요? 말씀하세요.
- 소수집단이 아니라 백인으로 태어난 건 셰릴이 통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시험성적처럼 열심히 노력해서 능력을 보여주는 게 아니죠. 인종은 자기 마음대로 정할 수 없으니까요.
- 좋아요. 이름이 뭐죠?
- 브리입니다.
- 좋아요. 브리는 계속 서 있고 누구 브리한테 답변할 분? 말씀하세요.
- 교육환경의 격차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저도 뉴욕에 살 때 줄곧 느낀 거지만 소수 인종이 다니는 학교에 재정은 백인 학교처럼 넉넉하지 않습니다. 그 격차는 계속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백인은 더 좋은 학교에 진학하는 반면 소수 인종은 열악한 교육환경 때문에 백인보다 성적도 떨어지고…
- 잠깐 끼어들어도 될까요? 이름이 뭐죠?
- 애니샤입니다.
- 애니샤가 지적한 건… 소수 인종이 다니는 학교는 다 그렇지 않겠지만 부잣집 학생들과 똑같은 교육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 네
- 그럼 시험성적도 그 아이들의 진정한 잠재력을 보여주지는 못하겠군요?
- 똑같은 지원을 받았다면 더 부유한 학교에 갔을 테니까요.
- 네, 애니샤의 요지는 이런 거죠? 학교가 학업성취능력을 보고 학생을 뽑는 건 당연하지만 시험성적과 학업성적을 볼 때는 그 자체만 보지 말고 그 이면에 깔린 불리한 교육여건도 고려해야 한다는 거죠? 이게 소수집단우대정책에 찬성하는 애니샤의 입장입니다.
준비과정의 차이, 불리한 교육여건이 낳은 결과를 바로 잡자는 거죠. 그런데 다른 입장도 있습니다. 두 입장이 원칙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기 위해 이런 가정을 해 봅시다. 두 명의 응시자가 있다고 합시다. 시험성적과 학업성적이 둘 다 우수한 학생들입니다. 둘 다 일류대학에 지원했습니다. 이 두 응시자를 놓고 하버드 같은 대학에서 이렇게 말하면 부당할까요? ‘그래도 우리는 인종적, 민족적 차원에서의 다양성을 원합니다. 불리한 교육여건으로 인한 시험성적의 차이를 바로 잡지 않더라고 말입니다.’
- 이런 경우엔 어떤가요, 브리?
- 그런 것들이 누군가를 화나게 한다면 항의하는 건 당연하지 않나요? 재능이나 출신, 인성처럼 자의적인 요소를 뺀 나머지가 다 같은데 자기만 탈락하면요.
- 그런 ‘자의적인 요소를 뺀다’고 했나요? 아까는 인종이나 민족성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자의적인 요소라고 하지 않았나요?
- 네, 그렇게 말했죠.
- 일관된 법칙은 입시가 자기통제를 벗어난 자의적 요소에 대한 보상이어선 안 된다?
- 맞아요!
- 좋습니다.
- 또 다른 의견? 둘 다 수고 많았어요. 또 다른 의견 있으면… 말씀하세요.
- 저는 한시적 소수집단우대정책에 찬성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진데 하나는 학생 교육이라는 대학의 목적 때문입니다. 인종이 다르면 그 배경이 다를 테고 교육에 기여하는 바도 다를 테니까요. 또 하나는 교육여건이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노예제도의 역사 같은 걸 볼 때 소수집단우대정책은 일종의 보상으로 한시적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특히 흑인에게 자행된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해서요.
- 이름이 뭐죠?
- 데이비드입니다.
- 적어도 지금은 소수집단우대정책이 노예제도와 인종차별 같은 과거에 부당함에 대한 보상으로 정당하다는 거죠?
- 네
- 이 주장에 반박할 분? 소수집단우대정책 반대론자 없나요? 네, 말씀하세요.
- 과거는 과거일 뿐 현재와는 상관없고 인종차별은 언제나 잘못이라고 봅니다. 누가 누구를 차별하는 건 잘못이죠. 잘못은 조상이 했는데 그게 왜 우리한테까지 영향을 줘야 하죠?
- 좋습니다. 이름이 뭐죠?
- 케이트입니다.
- 자, 케이트 말에 답변할 분? 말씀하세요.
- 제가 하고 싶은 말은…
- 이름이 뭐죠?
- 몬수어입니다. 과거의 부당한 노예제도 때문에 현재 상당수의 흑인이 가난하게 살고 백인보다 기회도 적지 않나요? 2백 년 전의 노예제도 때문에, 흑인을 차별한 짐 크로 법 때문에, 지금도 인종차별 풍토는 남아 있으니까요.
- 케이트?
- 인종 간 격차는 분명히 있지만 그걸 바로 잡는 길은 인위적으로 결과를 고치는 게 아니라 그 문제를 고치는 거죠. 교육과 성장환경의 차이를 고려해서 저소득층 자녀 지원 프로그램으로 그런 학교에 재정지원을 늘려야지 결과를 바꾸는 건 겉으로만 평등한 척하는 거죠.
- 말씀하세요.
- 그렇게 따지면 4백 년이 넘도록 인종우대정책을 펴온 건 오히려 백인들 아닌가요? 그런 족벌 정치, 패거리 정치에 대해 4백 년 동안 흑인에게 자행된 불의와 차별을 바로잡겠다는 게 왜 잘못이죠?
- 좋습니다. 이름이 뭐죠?
- 해나입니다.
- 좋습니다. 해나에게 답변할 분? 그 전에 하나만 묻죠. 이 문제까지 함께 대답해야 하니까요. 해나는 동문자녀 특례입학제도 지적한 겁니까?
- 물론이죠. 인종우대정책에 반대한다면 동문자녀 특례입학제에도 반대해야죠. 우리 하버드 대학만 해도 전통적으로 백인 동문이 흑인 동문보다 많지 않나요?
- 동문자녀 특례입학제가 뭐죠?
- 부모가 졸업한 학교에 자녀가 지원할 때 특혜를 주는 입시전형제도입니다.
- 좋습니다. 여기에 답변할 분?
- 네, 2층에 있는 분 말씀하세요.
- 소수집단우대정책에 부당한 결과를 보상하기 위한 거라지만 역사적으로 차별받지 않은, 불이익을 당한 게 없는 소수 집단은 어떻게 설명하죠? 게다가 이 정책은 오히려 인종구분을 고착화했으면 했지 궁극적으로 인종차별이 없는 사회를 만드는데 도움이 안 된다면요?
- 이름이 뭐죠?
- 드니엘입니다.
- 해나?
- 제 생각은 다릅니다. 이런 교육기관이 다양성을 추구하는 건 모든 학생, 특히 백인중심지역에서 자란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서입니다. 다양한 출신을 접하는 것도 일종의 교육인데 계속 백인끼리 어울리라면 그것도 백인에게 부당한 일 아닌가요?
- 다양성이 왜 꼭 인종이어야 하죠? 다양성의 형태는 많은데 인종에 따라 달라진다고 보는 것 역시 우리 사회의 인종차별을 고착화하는 거 아닌가요?
- 해나?
-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왜 특혜를 주는지 생각해 보면 특별히 기여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죠. 종교나 사회경제적 배경이 다른 사람처럼 독특한 관점을 제시하니까요. 말씀하신 대로 다양성의 형태는 많은데 그 기준에서 인종만 뺄 이유는 없죠.
- 네, 말씀하세요.
- 미국에서 인종차별은 불법입니다. 흑인 지도자들도 이 점을 강조했고요. 킹 목사님도 피부색이 아니라 개성, 장점, 성과로 한 사람을 판단하라고 했듯이 인종만으로만 사람을 판단하는 건 원래부터 부당한 일입니다. 불리한 여건을 바로 잡는 건 좋지만 그것 때문에 백인도 불이익을 당한다면…
- 잠깐만요. 이름이 뭐죠?
- 테드입니다.
- 테드? 홉우드의 경우엔 어떤가요? 인종을 중시하는 게 부당하면 민족이나 종교도 마찬가지라는 건가요?
- 네
- 홉우드는 학업성적과 시험성적만으로 평가받을 권리가 있다는 겁니까?
- 아뇨, 그것만은 아니죠. 그 밖에도 대학은 다양성을 증진할 의무가 있고…
- 다양성 증진이란 목표엔 동의하는 거네요?
- 본인이 통제할 수 없는 요소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도 다양성을 증진할 길은 있으니까요.
- 네, 그게 잘못인 이유는 인종은 자기가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죠. 백인으로 태어난 건 통제할 수 없다는 게 홉우드의 핵심주장입니다. 브리의 말처럼 통제 불가능한 요소가 입학기준이 되는 건 기본적으로 부당하다는 건데 다른 의견 있나요?
-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건 많은데 능력과 시험성적만으로만 극복하라고요? 자기가 성취한 것도 대부분 가정환경 탓인데 부모가 학구적이면 자녀도 학구적이라 시험성적도 더 잘 나오겠지만 부모는 자기가 선택한 게 아닌데…
- 네, 좋은 지적입니다. 이름이 뭐죠?
- 다입니다.
- 다
- 테드, 남들보다 좋은 가정환경의 여향은 없을까요? 동문자녀 특례입학제는 어때요?
- 동문자녀 특례입학제 같은 경우엔 특별히 누굴 더 선호한다기보다는 다양성의 한 측면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버드 대학 입장에선 몇 대째 같은 학교를 나온 소수의 동문가정을 갖는 게 중요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인종 문제와는 달리 다양성을 증진하는 방편일 뿐…
- 그래서 중요하다는 겁니까? 그래서 동문의 지위가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 네, 중요하죠.
- 네, 이 논의는 일단 여기서 접죠.
- 발표자 모두 수고했고 한 명씩 또 얘기하겠습니다.
■ 소수집단우대정책 지지론
1. 시정논리 - 교육여건의 격차 바로잡기 2. 보상논리 - 과거의 잘못에 대한 보상 3. 다양성 논리 - 다양한 교육체험 제공 - 사회 전체를 위해 |
지금까지 나온 얘기들을 정리하면 세 가지 입장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인종과 민족도 입학기준에 포함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불리한 교육여건이 낳은 결과를 바로 잡자는 주장이죠. 애니샤가 주장한 이 입장은 ‘시정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육여건의 격차를 바로 잡자는 논리입니다. 출신학교와 기회의 차이 같은 걸 고려해서요. 이게 첫 번째 입장인데 주목할 점은 이 입장에 한결같이 나타나는 원칙입니다. 즉 ‘수학능력만을 입학기준으로 삼되 진정한 수학능력 평가를 위해서라도 액면 그대로의 성적만 봐서는 안 된다.’ 이것이 첫 번째 주장입니다.
두 번째 불리한 교육여건은 차치하더라도 소수집단우대정책은 정당하다는 겁니다. 특히 흑인의 경우, 과거에 자행된 잘못에 대한 보상으로 정당하다는 거죠. 즉, 과거의 잘못에 대한 보상하자는 ‘보상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소수집단우대정책에 대한 약간 다른 찬성론이었죠? 해나 같은 학생들이 주장한, 다양성을 내건 주장이었습니다. 이 다양성 논리는 보상 논리와는 다릅니다. 다양성 논리는 대학의 사회적 목적, 사회적 사명에 호소하는 논리니까요. 다양성 논리도 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전교생의 교육적 체험을 위해 다양한 학생층이 필요하다’는 해나와 같은 주장이죠. 또 하나는 더 큰 사회를 강조하는, 홉우드 사건 때 텍사스 주립대학의 입장입니다.
“우리 대학은 변호사와 판사, 사회지도자, 국가공무원을 길러내야 합니다. 텍사스 주와 국가 전체 차원에서 시민역량강화에 기여할 인재들을 말이죠.” 다양성 논리도 둘로 나뉘기는 하지만 둘 다 교육기관의 사회적 목적, 사명, 공공선을 내세운다는 점은 같습니다.
지금까지 이 세 가지 논리에 어떤 반대들이 나왔죠? 보상논리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는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날 셰릴 홉우드에게 강요할 수 있나요? 과거에 저지른 엄청난 불의를 보상하려고 지금 희생을 강요하는 게 정당한 일인가요? 홉우드와는 무관한 일이니 부당합니다.’ 보상 논리에 대한 중요한 반박인데 이 논리에 맞서려면 대대로 전수되는 집단적 권리나 공동의 책임이 있는지 알아봐야겠죠.
일단 이렇게 쟁점만 정리하고 다양성 논리부터 살펴봅시다. 다양성 논리에선 과거의 잘못에 대한 공동의 책임을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해나의 말처럼 이 다양성 논리에서는 공공선의 추구와 증진이 가능하니까요. 인종적, 민족적으로 다양한 학생층만 갖추면 모두에게 이익이니 말입니다. 이 논리는 실제로 하버드 대학이 대법원에 제출한 변론준비서에 담긴 내용입니다. 1978년 소수집단우대정책 문제로 배키 학생과 소송할 당시에요.
하버드 측에서 제시한 변론은 이 소송에서 결정권을 쥐고 있던 파월 판사가 낭독했는데 파월 판사는 하버드 측 변론이 헌법 정신에 합치된다고 판단했죠. 하버드의 변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다양성입니다. 학업성취도만이 하버드 대학의 유일한 입학 기준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15년 전에 다양성이란 말은 캘리포니아, 뉴욕, 매사추세츠 출신을, 도시주민과 농촌자녀, 바이올리니스트, 화가, 축구선수, 생물학자, 역사학자, 고전학자를 의미했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른 점은 오직 다양성을 고려한 이 긴 목록에 인종적, 민족적 지위가 추가된 것뿐입니다."
"우리 학교 수업을 잘 들을 수 있는 수많은 응시자를 검토할 때 인종이란 요소도 아이오와 출신이나 수비수, 피아니스트인 것처럼 가산 요인이 됩니다. 아이다호 농장 출신은 보스턴 출신이 하버드에 못 하는 공헌을 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흑인 학생은 백인 학생이 못 하는 공헌을 할 수 있죠. 모든 학생이 체험하는 교육의 질은 학생들 간의 배경과 사고방식의 차이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 하버드 변론 준비서 中
이것이 하버드 측 변론인데 이 다양성 논리가 설득력이 있나요? 이 주장에 수긍한다면 막강한 반대에 부딪혀야 할 겁니다. 아까 우리도 들은 반대죠? 테드와 브리에게서요. 여러분이 공리주의에 반대해 개인의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고 본다면 문제는 바로 이겁니다. ‘개인의 권리가 침해당했는가?’ 셰릴 홉우드의 권리가 침해당했나요? 소위 희생양이 된 겁니까? 텍사스 주립대학 법학전문대학원이 자체적으로 정한 공공선과 사회적 사명에 희생된 겁니까? 홉우드에게는 권리가 있나요? 뛰어난 재능과 성과, 노력에 따라 도덕적 자격이 생기는 건 아닌데 권리의 문제는 아니지 않아요? 그 대답은 이미 아시는 대로 네, 홉우드에게는 권리가 없습니다. 합격해 마땅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건 다시 자격과 권리의 문제로 귀결되죠? 여기에 홉우드 개인의 권리는 없답니다. 자기가 중요하다고 믿는 어떤 기준으로 도덕적으로 합격의 자격을 논할 순 없죠.
가령 홉우드의 노력돠 성과만을 보는 기준으로는 자격을 논할 수 없는 데 왜죠? 이 주장을 잘 생각해 보세요. 도덕적 자격은 분배정의의 기준이 아니라는 롤스의 말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네, 하버드가 자신의 사명을 정하고 그 사명에 따라 입학정책을 만들면 그 기준에 맞는 사람에게는 입학할 권리가 주어집니다. 하지만 도덕적 자격이 있는 건 아니죠. 애초에 하버드 대학이 정한 사명과 입학기준이 우연히 자신이 많이 가진 자질을 포상한 것뿐이니까요. 그 자질이 시험성적이든 학점이든 피아노 실력이든 수비능력이든 아이오와 출신이란 것이든 소수 집단 출신이란 것이든 말입니다. 이 소수집단우대정책 논쟁은 특히 이 다양성 논쟁은 권리의 문제뿐 아니라 도덕적 자격이 분배정의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이 문제는 다음 시간에 계속 토론해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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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는 입학할 때 인종이란 요소를 고려하는 소수집단우대정책에 대한 찬반양론을 살펴봤습니다. 이 논의 과정에서 소수집단우대정책에 찬성하는 세 가지 입장이 나왔죠? 하나는 인종적, 민족적 배경을 고려해 불평등을 바로 잡아야 시험성적과 학점의 진정한 의미, 그 숫자들에 담긴 학업성취능력이 더 정확히 측정된다는 ‘시정 논리’였고 두 번째는 일명 ‘보상 논리’였습니다. 과거의 잘못이나 부당함을 바로 잡자는 거죠. 세 번째 ‘다양성 논리’였습니다.
1990년대에 셰릴 홉우드가 텍사스 주립대학 법학전문대학원의 소수집단우대정책이 부당하다며 연방법원에 고소했을 때 텍사스 주립대학은 다양성을 내세운 또 다른 주장을 했죠. 텍사스 주립대학의 더 큰 사회적 목적, 사회적 사명은 지도자 양성이기 때문에 즉, 판사, 변호사, 국회의원 같은 법조계와 정계 지도자의 양성이기에 본 대학의 지도자 양성에서의 주안점은 텍사스 전체 인구의 출신배경과 경험, 민족적, 인종적 구성비를 반영하는 것이라고요. 보다 큰 사회적 사명에 복무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 텍사스 주립대학 당국의 주장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반론도 살펴봤죠? 다양성 논리는 결국 사회적 사명, 공공선을 내세운 주장일 뿐이니까요. 롤스는 공공선이나 일반의 복지가 최우선이라고 보지는 않았죠? 공공선을 증진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면 안 되니까요. 이게 마지막에 던진 질문이었죠? 다양성에 대한 이 반문을 끝으로 지난 수업을 마쳤습니다. 이 문제를 계속 토론하면, 어떤 권리가 침해당했다는 걸까요? 자기 통제를 벗어난 요소로는 판단되지 말아야 할 개인의 권리를 침해한 겁니까? 셰릴 홉우드는 은연중에 이런 주장을 펴는지도 모릅니다.
‘백인으로 태어난 건 어쩔 수 없는 일인데 법학전문대학원 합격 여부가 왜 자기통제를 벗어난 일에 좌우돼야 하죠?’ 그때 해나가 이 주장에서 한발 더 나아가 하버드는 사립학교니까 대학의 사명을 마음대로 정할 권리가 있다고 했죠? 하버드가 일단 그 사명을 정하면 어떤 자질을 입학기준으로 삼는지 알 수 있으니까 개인의 권리침해는 아니라고 합니다. 자, 이 주장은 어떤가요? 일단 이 주장에 대한 반대의견을 들어보고 또 그에 대한 반론을 들어봅시다.
- 말씀하세요. 이름이 뭐죠?
- 다입니다.
- 다, 저번 시간에도 발표했죠? 좋아요.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 두 가지를 지적하고 싶은데 하나는 사립기관이 마음대로 정한 사명이 꼭 올바른 사명이라고 볼 순 없다는 거죠. 저도 제 사명을 ‘세상의 돈을 다 모으겠다’고 정할 순 있지만 그게 좋은 사명일까요? 그러니까 대학도 사립기관이라고 마음대로 사명을 정할 수 없고 올바른 사명을 정했는지는 우리가 계속 고민할 문제죠. 소수집단우대정책만 해도 의견이 분분하잖아요. 인종문제처럼 다양한 의견을 반영해 불완전한 제도를 보완해야…
- 네, 첫 번째 지적에만 집중합시다. 다의 반론은 이겁니다. ‘대학은 사회적 목적을 제멋대로 정할 수 있나요?’ ‘그에 따라 입학기준을 정해도 됩니까?’ 지금이 아닌 1950년대의 텍사스 대학 법학전문대학원은 어땠을까요? 그때도 대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적이 있죠. 소수집단우대정책이 부당하다고요. 인종을 차별했으니까요. 백인만 받아들였거든요. 1950년대에 이 사건이 법정에 갔을 때도 텍사스 법학전문대학원은 대학의 사명을 내세웠습니다.
"법학전문대학원으로서 우리의 사명은 텍사스 법정, 텍사스 법률회사에 필요한 법조인들을 양성하는 것인데 흑인을 채용하는 텍사스 법률회사는 없습니다.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우리는 백인만 받아들입니다."
1930년대에 하버드는 어땠는지 아십니까? 유대인의 입학을 불허하는 조항이 있었죠. 당시 하버드 총장이었던 로월 총장은 개인적으로 유대인에게 반감은 없지만 하버드의 사회적 목적, 사명은 지식인 양성만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버드의 사명 중 하나는 월가의 증권 중개인이나 대통령, 상원의원 양성인데 그런 지위에 오른 유대인은 극소수라고 했죠. 이제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이 두 주장은 원칙상 차이가 있나요? 오늘날 다양성의 근거로 대학의 사회적 목적을 내세우는 주장과 1950년대 텍사스 주립대학과 1930년대 하버드 대학이 대학의 사회적 목적을 내세운 주장은 원칙상 차이가 있습니까?
어떻게 보십니까? 해나?
- 제가 볼 때 두 입장의 원칙상의 차이는 포용과 배제입니다. 대학이 종교나 인종 때문에 누군가를 배제하면 도덕적으로 잘못이죠. 자의적인 기준으로 거부한 거니까요. 그런데 지금 하버드가 다양성을 내세우는 이유는 과거에 배제된 집단을 포용하기 위해서잖아요.
- 좋아요. 계속 서 있고 반대의견도 들어봅시다. 말씀하세요.
- 반대가 아닌 찬성의견이라 괜찮을지 모르겠는데…
- 괜찮아요.
- 또 다른 원칙상의 차이는 인종차별에 찬성하는 동기, 악의의 유무가 아닐까요? 흑인이나 유대인을 받지 않겠다는 이유가 사람이나 집단으로서 저질이라는 생각이요.
- 네, 지금은 악의성이 없다는 건데 이름이 뭐죠?
- 스티비입니다.
- 스티비의 말은… 유대인 할당제에 대한 인종차별적, 인종주의적 거부에는 일종의 악의적인 판단이 녹아들어 있다는 거죠. 흑인이나 유대인은 다른 사람보다 가치가 없다는 생각 말입니다. 반면 지금의 소수집단우대정책엔 그런 가치판단이 들어 있지 않고요. 두 사람 말을 종합해 보면 이런 거네요?
어떤 기관의 정책이 사회적 목적달성을 위해서 단지 사람들을 이용하는 거라면 스티비 말처럼 사람을 악의적으로 판단하거나 사람의 가치를 평가절하하지 않으면 괜찮다, 그럼 한 가지 묻겠습니다. 우리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도무 어떤 직책을 놓고 경쟁할 때 대학의 자리를 놓고 경쟁할 때 우리는 판단되는 게 아니라 사용되는 거 아닙니까? 도덕적 자격과는 무관하게 사용되는 게 아닐까요? 우리가 지금까지 소수집단우대정책을 논한 것도 분배정의가 도덕적 자격의 문제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려는 시도였습니다.
롤스가 왜 분배정의를 도덕적 자격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는지 알기 위해서였죠. 사회적 직위가 됐든 수입과 재산이 됐든 그 전에는 분배정의를 도덕적 자격의 문제로 봤습니다. 하버드 입학정책에 이런 도덕적 판단이 깔려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불합격이나 합격 통지문을 쓸 때 뭐라고 쓸까요? 아마 이렇게 쓰지 않을까요?
“불합격한 응시자께, 유감스럽게도 귀하의 입학신청은 거절당했습니다. 귀하가 제공하려는 자질은 현 사회가 우연히 원치 않을 뿐, 귀하의 잘못은 아닙니다. 귀하 대신 합격한 사람이 응당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합격 요인을 갖춘 게 칭찬받을 일도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학생들을 보다 큰 사회적 목적의 도구로만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엔 꼭 합격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받은 입학허가통지서는 어땠나요? 아마 이렇게 바뀌어야겠죠.
“합격한 응시자께, 기쁘게도 귀하의 입학신청이 받아들여졌음을 알려드립니다. 귀하는 천만다행히도 현 사회가 원하는 특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귀하가 그 자신을 개발해 사회에 도움이 될 것을 권합니다. 귀하는 축하받을 것입니다. 입학 요인을 갖춘 것이 귀하의 공이어서가 아니라 당첨된 승자는 축하를 받기 때문입니다. 귀하가 우리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이런 식으로 귀하가 사용되는 것에 따른 혜택이 주어질 것입니다. 가을에 뵙기를 바랍니다.”
도덕적으로 약간 어색하지 않나요? 이 통지서들에 입학정책의 이론적, 철학적 배경을 담아서 실제로 이렇게 쓴다면 말입니다. 아마 이런 의문이 들 겁니다. 이 질문은 정치철학의 큰 쟁점입니다. 즉, ‘분배정의를 도덕적 자격이나 미덕과는 별개의 문제로 보는 게 과연 가능하고 바람직한가?’
바로 이 점에서 현대 정치철학은 여러모로 과거의 정치철학과 구분되는데 도덕적 자격을 분리하면 어떤 차이가 있기에 그럴까요? 롤스는 왜 그랬던 것 같습니까? 롤스가 분배정의를 도덕적 자격에서 분리한 동기, 이유는 평등주의적 사고 때문이었죠. 자격을 치워놓고 보면 평등주의적 사고를 펼칠 수 있는 더 큰 장이 열리니까요. 무지의 장막과 정의의 두 원칙, 차등의 원칙, 극빈 계층 돕기, 재분배 같은 사고들 말입니다. 재미있는 건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일련의 사상가들이 평등에 대한 관심에 상관없이 모두가 정의와 자격을 분리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자유주의적 권리지항론자도 평등주의적 권리지항론자처럼, 롤스는 물론이고 이 문제에 관한 한 칸트도 역시 분배정의나 복지국가 등에 대한 이견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은 바로 정의는 미덕이나 도덕적 자격에 대한 포상이나 예우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왜 모두 그렇게 생각할까요? 평등주의적 이유 때문일 리는 없죠. 모두 평등주의자는 아니니까요. 이것이 우리가 물어야 할 커다란 철학적 숙제입니다.
왠지 정의를 도덕적 자격이나 미덕의 문제로 보면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존중, 자유에서 멀어진다는 게 이들의 생각인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들의 공통된 가정이 뭔지 알아내려면 반대 입장을 가진 철학자와 비교해 보면 되겠죠? 공공연하게 정의는 미덕, 능력, 도덕적 자격을 존중하는 문제로 보는 사람 말입니다. 그 철학자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죠.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은 직관에 강하게 호소하는 면이 많지만 이상한 면도 있습니다. 이 정의론이 가진 설득력과 이상함을 모두 파악해야 정의를 자격이나 미덕의 문제로 보느냐 마느냐의 결정적 차이가 뭔지 알 겁니다.
그럼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가 뭐라고 했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는 사람들이 응당 받아야 할 몫을 주는 문제입니다. 정의는 사람들이 지닌 미덕에 딱 맞는 사회적 역할을 찾아주는 문제였죠. 이 정의론은 어떤 인상을 줍니까? 자유주의나 평등주의적 권리지항론자들 모두가 공유하는 개념과는 어떻게 다르죠?
정의는 각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주는 것이라는데 그 몫이란 무엇일까요? 능력이나 자격과는 어떤 관계죠?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 몫은 분배물의 종류에 따라 달라집니다.
“정의의 두 가지 요소는 사물과 그 사물이 배정될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평등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배정된 사물도 공평하게 가져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여기서 어려운 문제가 생깁니다. 어떤 관점에서 평등하다는 뜻일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합니다. ‘그건 분배물에 따라 달라진다.’ 가령 플루트를 분배한다고 합시다. 플루트를 받기에 적합한 능력이나 자격은 무엇일까요? 누가 최고의 플루트를 받아야 합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을 아는 분? 네, 플루트를 제일 잘 부는 사람이죠. 플루트를 가장 잘 연주하는 사람입니다. 플루트를 나눠줄 때 차별은 정당한가요?
네, 모든 정의는 차별을 내포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합니다. 문제는 그 차별이 그에 관련된 탁월함, 미덕에 따라 이뤄지는가 플루트를 갖는 게 적합한가입니다. 플루트의 분배기준이 그게 아니고 다른 게 된다면 부당하다고 했죠. 가령 재산에 따라 제일 돈을 많이 낸 사람한테 최고의 플루트를 주거나 출생신분에 따라 귀족에게 플루트를 주거나 미모에 따라 최고의 미남미녀에게 주거나 운에 따라 추첨해서 준다면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출신과 미모는 플루트 연주능력보다 더 큰 선일 수 있지만 출신과 미모가 뛰어난 사람의 미덕이 플루트 명연주자의 미덕을 능가하더라도 최고의 플루트는 여전히 그 연주자가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상한 비교라는 건 알지만 예를 들면 이런 비교와 같습니다.
“내가 저 일류 운동선수보다 잘 생겼지?”
이상한 비교인 건 알지만 적당히 새겨들어 주십시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가 찾는 건 최고의 팔방미인이 아니라 최고의 연주자죠. 이게 바로 최고의 플루트가 최고의 연주자에게 가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말할 분 없으세요?
- 최상의 음악을 들려주기 때문인가요?
- 네?
- 최상의 음악을 들려주기 때문이라…? 그래서 모두가 즐겁기 때문에? 그건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이 아니죠.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리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래야 모두 최고의 음악을 듣고 즐거워지기 때문이라고 하지는 않겠죠.
최고의 플루트가 왜 최고의 연주자 몫이라고 했느냐면 플루트는 원래 그리라고 있는 거니까요. 잘 연주되라고 있는 거잖아요? 플루트 연주의 목적은 훌륭한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 목적을 가장 잘 완수할 사람이 플루트를 갖는 게 당연하다는 겁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좋은 점도 있겠죠. 모두 그 음악을 듣고 즐거워지니까요. 이렇게만 본다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중요한 건 그 이유가 공리주의적 이유는 아니란 거죠. 그 이유는, 우리 눈에는 조금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플루트를 연주하는 목적, 요지, 목표에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을 일반화시키면 공정한 분배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목표를 보자는 거죠.
■ 텔로스 요지, 목적, 목표 ■ 목적론적 추론 텔로스(목적, 목표)로부터의 추론 |
그리스어로 목표, 목적이란 뜻의 ‘텔로스’에 맞는지 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는 그 사물의 요지, 목적, 목표인 텔로스를 고려해야 하는데 이 경우엔 플루트 연주가 목적이죠. 공정한 분배인지, 공정한 차별인지는 이렇게 결정되는 겁니다. 그래서 목표 즉 텔로스에 근거를 둔 추론을 목적론적 추론이라고 부릅니다. ‘목적론적 도덕 추론’이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식은 이렇게 목표, 목적으로부터 추론하는 겁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좀 이상한 생각이긴 하죠? 하지만 목적으로부터 추론한다는 말은 얼핏들으면 쉽게 와 닿는 면이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제일 좋은 테니스 코트나 스쿼시 코트를 할당한다고 합시다. 어떻게 할당할까요? 제일 좋은 코트를 누구부터 쓰게 하죠? 이렇게 대답할 수 있죠. ‘돈이 제일 많은 사람이요.’ ‘요금제를 만들어 사용료를 받죠?’ 아리스토텔레스는 반대할 겁니다. 그럼 이건 어떨까요? ‘하버드에서 제일 영향력 있는 거물이요!’ 그게 누구일까요? ‘원로교직원부터 제일 좋은 테니스 코트를 쓰게 합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도 반대할 겁니다. 일류과학자들이 대학 테니스 대표 팀보다 위대할지는 몰라도 제일 좋은 코트는 테니스를 제일 잘 치는 테니스 선수부터 쓰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얼핏 들으면 쉽게 와 닿는 말이죠? 이런 생각이 낯선 이유 중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고대에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목적론적 추론이 단지 사회적 행동에만 국한되는 법칙은 아니라고 봤기 때문일 겁니다. 자연 만물엔 의미 있는 질서가 있는데 자연의 질서를 파악하고 그 안에서 우리의 위치를 파악하려면 자연의 목적, 텔로스를 탐구하고 읽어내는 게 중요하다고 봤죠.
현대과학의 출현으로 이제는 세상을 그런 식으로 보거나 정의를 목적론적으로 보기가 더 힘들어졌지만 자연세계조차 목적론적 질서를 가진, 목적에 맞는 전체로 보는 이런 시각에는 자연스러움이 있습니다. 실제로 아이들이 세상을 보는 눈도 이런 식으로 트여야 하고요. 저도 아이들이 어렸을 때 책을 읽어주다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곰돌이 푸’란 책인데 곰돌이 푸는 큰 영감을 주는 책이죠. 자연스럽고 아이다운 목적론적 세계관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니까요. 여러분도 기억날 겁니다. 하루는 곰돌이 푸가 숲속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나무 꼭대기에서 요란하게 붕붕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곰돌이 푸는 나무 밑동에 걸터앉아 앞발로 머리를 감사고 생각하면서 혼자 이렇게 중얼대죠.
‘저 붕붕 소리는 뭘 뜻할까?’
여러분은 붕붕 소리를 이렇게 보지 않죠? 그냥 아무 뜻 없는 붕붕 소리로만 보죠.
‘붕붕 소리가 난다면 누군가 붕붕 소리를 낸가는 거네?’
‘내가 알기로 붕붕 소리를 내는 이유는 딱 하나 벌이기 때문이지.’
또 한참을 고민하고 말하길,
‘내가 알기로 벌이 벌인 이유는 떡 하나, 꿀을 만들기 때문이지.’
그런 다음 벌떡 일어나 말하길,
‘꿀을 만드는 이유는 딱 하나, 먹으라는 뜻이지.’
그래서 나무를 타고 올라갑니다. 바로 이런 게 목적론적 추론입니다. 어때요? 아주 말이 안 되는 얘기는 아니죠? 우리처럼 성인이 되면 이런 식으로 세상을 보진 않지만 여러분이 보기엔 어떤가요? 목적론적 설명이 현대과학에 밀려났다고는 해도 그런 식으로 자연을 이해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자랐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의 직관과 도덕에 호소하는 무언가가, 강력한 무언가가 있지 않나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정의의 문제는 오직 사회적 행동의 목적, 목표, 텔로스에서 추론된다는 생각은 소수집단우대정책을 둘러싼 논쟁에서도 그대로 드러나지 않나요?
그 논쟁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으니까요. 대학교육의 적절한, 적합한 목적이 무엇인가를 놓고 엇갈린 의견이었다고요. 의도한 목적, 궁극적 목적, 텔로스로부터의 추론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정의를 논할 때 반드시 필요한 것들에 진짜 그런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다루며 다시 생각해 보죠.
* 저작권은 PBS / Harvard University에 있고, 번역은 EBS 방송에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사용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