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하버드 특강 "정의" - 7부 거짓말의 교훈
7강. 거짓말의 교훈
(A Lesson in Lying / A Deal Is a Deal)
<개요>
임마누엘 칸트의 엄격한 도덕이론은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다. 칸트는 비록 ‘선의의 거짓말’이라도 거짓말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믿음에 따라 칸트 역시 평생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번 시간에 샌델 교수는 두 가지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학생들에게 칸트의 이론을 시험해보도록 한다. 자기 집에 숨어있는 친구를 죽일 목적으로 살인자가 찾아와서 노골적으로 그 친구가 집에 있는지 묻는다. 이런 경우 거짓말을 하는 것은 잘못인가? 잘못이라면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인자를 오해하게 만들어 친구를 구할 방법은 없을까? 샌델 교수는 빌 클린턴 대통령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추문을 교묘한 말로 부인한 청문회 관련 자료를 보여주면서 노골적인 거짓말과 상대를 오인하게 만드는 호도성 진술의 차이를 생각해본다. 이것을 통해 칸트가 말한, 진실을 말함으로써 도덕법(정언명령)을 준수하는 것이 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행동인지 살펴본다.
또한 현대철학자 존 롤스의 정의론을 살펴본다. 롤스에 따르면 정의의 원칙들은 실제계약이 아닌 ‘가상의 사회계약’으로부터만 도출될 수 있다. 실제계약은 각 이해세력의 출신배경이나 협상력, 지식의 차이와 같은 임의적 요소들이 개입되므로 항상 공정하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를 공동으로 지배할 정의의 원칙들은 실제계약이 아닌 가상의 계약으로부터 도출된다. 롤스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나이나 성별, 인종, 지식, 힘, 사회적 지위, 가정환경이나 종교, 인생의 목표마저 모르도록 ‘무지의 장막’에 가려진 상황을 가정한다. 이 ‘무지의 장막’에 가린 상태에서는 모든 사람이 원초적으로 평등한 입장에 놓이게 되므로 특수한 이해관계를 배제한 정의의 원칙에 합의할 수 있으며, 무지의 장막이 걷히고 불행하게도 자기가 최하위계층으로 판명 날 경우를 대비해 약자를 배려하는 차등의 원칙을 채택할 것이라고 한다. 샌델 교수가 제시한 재미있는 사례들(바닷가재를 잡아온 사람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으려는 계약자, 어린아이들의 야구카드거래, 물이 새는 변기, 데이비드 흄과 도색업자의 소송, 자동차수리업자 샘, 바람난 배우자)을 통해 공정한 계약이란 무엇인지, 정의의 원칙들은 어떻게 도출되는지 생각해보자.
<강의 내용>
지난 시간엔 칸트의 도덕이론으로 우리의 논의를 진전시켜봤습니다. 칸트의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의 도덕이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첫째, 의무와 자율은 양립가능한가? 의무에 응답하는 게 왜 그토록 존엄한가? 의무와 자율은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데 칸트는 뭐라고 했을까요? 칸트의 견해를 대변할 분? 칸트가 대답을 제시했나요?
- 네, 말씀하세요.
-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상황이 아니라 의무에 따를 때만 자율적으로 행동하고 개인의 사리사욕이 아닌 의무에 따른 선행만이 진정한 선행이라고 했습니다.
- 왜 그 행동이 ... 이름이 뭐죠?
- 매트입니다.
- 매트, 그 행동이 왜 자유로운 거죠?
- 그 도덕법은 외부의 강요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선택한 거니까요.
- 좋습니다. 도덕법에 따라 행동하는 이 의무는?
- 자신이 부과한 거니까요.
- 자신이 부과한 거니까. 의무와 자유는 양립할 수 있죠. 네, 잘했어요, 매트 이것이 칸트의 대답입니다. 수고 많았어요.
칸트에 따르면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도덕법에 지배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법을 만든 주체가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죠. 그 법에 복종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매트의 말처럼 그 법은 내 의지에 따라 부과한 거니까요. 따라서 칸트에게 의무에 따른 행동은 곧 자유로운 또는 자율적인 행동을 뜻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엔 도덕법이 몇 개나 될까요? 인간은 스스로 부과한 도덕법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존엄한 존재인데 나와 여러분의 양심이 같으리라는 보장이 있나요? 칸트의 대답을 아는 분?
- 도덕법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차이를 모두 초월하는 보편적인 법이기 때문에 세상엔 최상의 도덕법이 하나만 존재합니다.
- 네, 정확한 대답입니다. 이름이 뭐죠?
- 켈리(Kelly)입니다.
- 켈리, 칸트에 따르면 우리가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하면 모두 같은 도덕법에 도달한다는 보장이 있나요?
- 네.
- 그것은 바로 나, 마이클 샌델이나 켈리 자신의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럼 정확히 누가 선택을 한 거죠? 대리인에게 이 선택을 하게 만든 주체는 누구일까요?
- 이성이요? 순수이성이요.
- 이때 순수이성이란 정확히 어떤 뜻이죠?
- 순수이성이란 아까도 말했지만 어떠한 외부조건에도 좌우되지 않는 것입니다.
- 좋아요. 그 도덕법을 기꺼이 따르도록 나의 의지를 지배하는 이성은 스스로 그 도덕법을 선택할 때 작용하는 이성과 같은 이성이죠? 그래서 자율적인 행동과 스스로의 선택이 가능한 겁니다.
각자가 자율적인 존재로 스스로 선택을 하고 모두가 같은 도덕법, 즉 정언명령을 원하게 되는 거죠. 이때 어려운 질문이 하나 남습니다. 여러분이 매트와 켈리가 한 말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말이죠. 우리는 어떻게 이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1)이란 도덕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칸트에 따르면 이것에 답하기 위해선 먼저 두 가지 관점을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의 경험을 이해하게 해주는 두 가지 관점이죠. 이게 무슨 뜻인지 설명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이 자유로운 것은 우리 스스로 지각 세계의 일원으로 의지의 자율성을 인식할 때이다.” - 임마누엘 칸트 |
경험의 객체로서의 나는 감각의 세계에 속합니다. 거기서 내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인과율과 같은 자연법칙들이죠. 반대로 경험의 주체로서의 나는 지각의 세계에 머뭅니다. 여기서는 자연의 법칙과 무관한 자율적인 행동이 가능하죠. 나 스스로 부과한 법에 따라 행동할 수 있습니다. 칸트에 따르면 이 지각의 관점에서만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감각세계의 인과율과 무관하다는 것은 곧 자유롭다는 뜻이니까요. 인간이 완전히 경험적인 존재라면 공리주의자들의 가정처럼 말이죠. 우리가 감각을 통해 얻어진 것들에만 전적으로 종속되는 존재라면 고통이나 쾌락, 배고픔, 목마름, 식욕 같은 것만이 인간의 전부라면 우리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칸트는 말합니다. 그럴 때 인간의 의지는 언제나 대상에 대한 욕망에 지배될 테니까요. 그리고 모든 선택은 타율적이겠죠. 외부의 목적을 추구하기에 급급하니까요. 칸트에 따르면 ‘우리 인간이 자유로운 것은 우리 스스로 지각 세계의 일원으로 의지의 자율성을 인식할 때이다.’
이것이 주관과 객관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럼 정언명령은 어떻게 가능하죠? 바로 자유가 나를 지각세계의 일원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칸트도 인정했듯이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만은 아니라는 거죠. 인간은 지각의 세계, 자유의 영역에만 거주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행동은 항상 의지의 자율에 들어맞겠지만 우리 인간은 두 관점, 두 영역에 동시에 거주하기 때문에 즉, 자유의 영역과 필연의 영역 모두에 거주하기 때문에 언제나 간극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과 해야만 하는 일, 실제와 당위의 간극이죠.
다시 말해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에서 칸트가 내린 결론처럼 도덕은 경험적인 게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든, 과학으로 무엇을 발견하든 그것이 도덕적인 문제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도덕은 경험의 세계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과학은 도덕적인 진리를 제공할 수 없는 겁니다. 자, 이제 칸트의 도덕이론을 극단적인 사례로 시험해 볼까요? 실제로 칸트가 제시한, 살인자의 방문 사례입니다. 칸트는 거짓말은 잘못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지금까지 논의했듯이 거짓말은 정언명령에 어긋나기 때문이죠.
프랑스의 철학자 뱅자맹 콩스탕은 칸트를 비판하는 글에서 말했습니다. ‘어떻게 거짓말을 완전히 금하겠는가? 말도 안 된다. 가령 살인자가 당신 집에 숨어 있는 친구를 찾아왔다고 치자. 그 살인자가 노골적으로 당신 집에 친구가 있는지 물으면 어쩌겠는가? 이런 경우, 아무리 도덕적인 행동이라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은 정신 나간 짓이다.’ 콩스탕은 그 살인자가 진실을 알 자격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칸트는 원칙을 고수하는 반론을 하죠.
‘아무리 살인자라도 거짓말을 하는 건 잘못이다.’ 칸트에 따르면 그것이 잘못인 이유는 우리가 결과를 고려하기 시작하면, 정언명령에 예외를 두기 시작하면 전체 도덕의 틀을 포기하게 되고 결과주의나 규칙공리주의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나 칸트를 읽은 사람은 대부분 이해하기 힘든 궤변처럼 들릴 겁니다. 그래서 제가 칸트를 변호할까 합니다. 얼마나 설득력이 있었는지는 나중에 물어보도록 하죠. 저는 칸트의 설명에 근거해 그의 도덕론을 변론할 겁니다. 아까 말했듯이 살인자가 찾아와서 당신 집에 숨은 친구의 행방을 물으면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친구를 팔아넘기지 않을 수 있을까요? 혹시 묘안이 있는 분?
- 네, 일어나세요.
- 저 같으면 이럴 경우를 대비해 미리 작전을 짜둘 것 같아요. 살인자가 오면 집에 있다고 할 테니 도망치라고 하든가...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이 아닐까요?
- 칸트적 선택은 아닐 것 같군요. 그것도 거짓말이니까요.
- 아니죠. 그 말을 한 뒤에 없으니까요.
- 그렇군요. 네 잘 알았습니다. 다른 분?
-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하면 되죠. 옷장 안에 있지만 나왔을 수도 있고 친구가 어디로 갔을지도 모르니까요.
- 모른다고 해도 거짓말은 아니다? 바로 그때 친구가 옷장 안에 있는 걸 본 게 아니니까?
- 물론이죠.
- 엄밀히 말하면 사실이다?
- 네.
- 상대가 속기 쉬워도? 오해를 사더라도?
- 그래도 사실이잖아요.
- 이름이 뭐죠?
- 존입니다.
- 네, 방금 존이 중요한 얘기를 했습니다.
엄밀히 볼 때 사실을 말함으로써 현명하게 모면하는 법을 제시했습니다. 그럼 하나만 묻죠. 노골적인 거짓말과 호도성 진실은 도덕적으로 차이가 있을까요? 칸트가 볼 때 거짓말과 호도성 진실은 실제로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습니다. 어차피 결과는 같을 텐데 왜죠? 칸트에게 도덕의 잣대는 결과가 아니라 형식상으로 도덕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가끔 일상생활에서 ‘선의의 거짓말’이란 거짓말의 예외규칙을 볼 수 있는데요. 선의의 거짓말이 뭐죠? 상대가 기분 상하지 않도록 하는 거짓말 같은 거죠. 결과가 좋으면 된다는 식의 거짓말인데 칸트의 ‘선의의 거짓말’은 아니지만 ‘호도성 진실’은 지지할 겁니다.
넥타이를 선물 받았다고 칩시다. 상자를 열어 보니 끔찍합니다.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고맙습니다?’ 그 정도는 괜찮죠. 그런데 상대가 감상을 듣고 싶은 눈치입니다. 어떠냐고 직접 물어볼 수도 있고요. 선의의 거짓말로 멋지다고 할 순 있죠. 하지만 칸트의 입장에서 그런 거짓말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러면 어떨까요? 선의의 거짓말이 아니라 호도성 진실을 말한다면 상자를 열고 이러겠죠. ‘이런 넥타이는 난생 처음 봐요. 고맙습니다.’ 뭐 이런 걸 다 주시나? 뭐 이런 걸 다 주시나?
요즘 정치인 중에도 이런 일에 연루된... 왜요? 누군지 아시겠어요? 클린턴 대통령이 르윈스키와의 추문을 신중한 말로 부인한 사건 기억나죠? 그의 진술은 실제로 탄핵청문회에서 공공연한 논란거리가 됐습니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의 진술화면을 보고 도덕적인 차이가 있나 볼까요? 거짓말과 신중한 표현을 쓴 호도성 진실이 어떻게 다른지 봅시다.
* 1988년 1월 28일 빌 클린턴 대통령 - 국민들께 말하고 싶습니다. 잘 들어주세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저는 그 여자, 르윈스키 양과 성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누구에게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이 혐의는 잘못된 겁니다. * 1998년 12월 8일 대통령탄핵청문회 - 그 여자와 성적인 관계를 하지 않았다는 건 국민을 기망한 거짓말 아닙니까? 당시 대통령의 생각으로는... 일단 제 설명을 들어보시죠. 당시 대통령은 ‘성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다고 했습니다.(밥 잉글리스 공화당 하원의원) - 당시 대통령은 ‘성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게 말꼬투리나 잡는 회피성 답변 같아서 마음에 들진 않겠지만 당시 대통령에게 그 말은 전혀...(그레고리 크레이그 백악관 법률고문) - 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
자, 논쟁을 본 소감이 어떤가요? 어쩌면 법적인 말꼬투리 잡기 식 공방으로 보이겠죠. 대통령을 탄핵하려는 공화당의원과 변호인 간의 공방으로요. 그럼 칸트의 입장에서 볼 때 도덕적인 차이는 없을까요? 거짓말과 진실은 진실이되 회피성, 호도성 진술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칸트의 입장을 대변해 주실 분?
- 말씀해 보겠습니까?
- 거짓말과 호도성 진실을 동일시하는 건 결과가 같으니까 같다는, 결과론적 주장입니다. 문제는 자기는 사실을 말했고 사람들을 그렇게 믿게 하려는 의도에서 한 말은 도덕적으로 사실이 아닌데 사실로 믿게 만드는 거짓말과는 다르다는 거죠.
- 좋아요. 이름이 뭐죠?
- 다이애나입니다.
- 다이애나의 말대로 칸트의 지적은 빌 클린턴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다시 말해 ... 혹시 다른 의견 있나요? 말씀하세요.
- 칸트에게 중요한 건 동기죠? 환심을 사려고 선물을 하는 건 도덕적으로 가치 없는 일입니다. 이 경우에도 동기는 거짓말처럼 사람을 호도해 곤경에 빠뜨리는 거니까 사실상 차이가 없다고 봅니다.
- 좋습니다. 이 경우에도 동기는 같지 않나요, 다이애나? 동기가 같다는 주장은 어떤가요? 둘 다 추격자가 오해하길 바라는 마음이나 시도가 있는 것 같은데요?
-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일차적인 동기는 상대가 자기 말을 믿게 하는 거죠. 최종적인 결과가 상대방이 속거나 상황을 알지 못하는 것이 될지언정 일차적인 동기는 진실이니까 믿게 하는 겁니다.
- 좀 도와줄까요?
- 네.
- 학생과 칸트를 위해서 이렇게 말하면... 참, 이름이 뭐죠?
- 웨슬리입니다.
- 웨슬리한테 이러면 어떨까요? 이 경우에 동기는 둘 다 상대를 오해하게 만들려는 것은 아니라고요. 물론 상대가 오해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은 했겠죠.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나 ‘성관계를 갖지 않았습니다’란 말엔 오해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있지만 호도성 진실을 말할 경우 그 동기는 오해를 일으키는 것임과 동시에 진실을 말해 도덕법을 존중하고 정언명령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죠. 칸트라면 이렇게 답했을 것 같은데 그렇죠. 다이애나?
- 네.
- 마음에 들어요?
- 네.
- 그러니까 칸트에 따르면 거짓말과는 달리 호도성 진실은 어느 정도 의무에 예의를 표한다는 겁니다. 의무에 예의를 표하는 한 회피성 진술도 정당화된다는 뜻이죠. 다이애나, 마음에 듭니까? 좋습니다.
그러니까 신중한 회피에는 존엄한 도덕법에 대한 존중이 있다는 겁니다. 클린턴도 그냥 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는데 하지 않았죠? 칸트가 보기에 이것은 신중한 표현을 쓴 진실한 회피이므로 노골적인 거짓말에는 없는, 존엄한 도덕법에 대한 존중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동기의 일부라는 것이죠, 웨슬리. 맞아요. 난 살인자가 오해하고 시장으로 달려가 내 친구를 찾지, 옷장에서 찾기를 바라진 않습니다. 그런 결과를 바라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 결과를 통제할 순 없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도덕법을 지키고 존중하는 겁니다. 내가 추구한 목적, 내가 바란 것이 어떤 결과를 낳든 일관되게 도덕법을 존중하는 행동입니다. 웨슬리가 완전히 동의하는 표정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논쟁을 통해 칸트의 정언명령이란 개념에서의 도덕적인 차이가 뭔지는 알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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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엔 칸트의 정언명령에 대해 알아보고 정언명령이 어떻게 거짓말에 적용되는지 살펴봤습니다. 이번엔 칸트의 도덕이론을 정치이론에 적용시킨 사례를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칸트에 따르면 정당한 법은 일종의 사회계약에서 발생합니다. 하지만 이 계약은 예외적인 속성이 있죠. 이 계약이 예외적인 이유는 실제계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어떤 제도를 만들지 고민한 결과물이 아니니까요. 칸트에 따르면 정의의 바탕이 되는 이 계약은 소위 ‘이성의 이념’입니다.
이 계약은 제헌회의에 모인 실제 남녀들의 실제계약이 아닙니다. 왜 아니죠? 칸트에 따르면 실제 남녀가 진짜 제헌회의에 모이면 각자의 이익과 가치, 목적이 다르고 협상력과 지식에도 차이가 있을 겁니다. 이 토의에서 만든 법은 공정하리란 보장도 정의의 원칙들에 부합하리란 보장도 없겠죠. 그저 협상력과 특수한 이해관계의 산물일 뿐입니다. 법정이나 정치를 더 많이 아는 사람에 의해 좌우될 겁니다. 그래서 칸트는 말하죠.
“권리 원칙들의 바탕이 되는 계약은 이성의 이념일 뿐이지만 의심할 수 없는 실체를 갖는다. 이성의 이념은 국가 전체의 통일된 의지에 따라 법률을 제정하는 식으로 개별 입법자를 강제하기 때문이다.” - 임마누엘 칸트 - |
“권리 원칙들의 바탕이 되는 계약은 이성의 이념일 뿐이지만 의심할 수 없는 실체를 갖는다. 이성의 이념은 국가 전체의 통일된 의지에 따라 법률을 제정하는 식으로 개별 입법자를 강제하기 때문이다.”
정의론
칸트는 사회계약론자입니다. 하지만 법의 기원과 정당성을 실제 사회계약에서 찾지는 않습니다. 그럼 당연히 이런 의문이 들겠죠? 한 번도 맺은 적이 없는 가상의 계약이 어떻게 도덕적인 효력을 가질까요? 이것이 오늘의 논제입니다. 이것을 검토하려면 먼저 현대철학자 존 롤스를 살펴봐야 합니다. 존 롤스는 <정의론>에서 정의의 기초로 가상의 계약을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롤스의 정의론은 크게 볼 때 칸트와 두 가지 핵심에서 같은 입장입니다.
첫째, 칸트처럼 롤스도 공리주의를 비판했죠.
“모든 개인에겐 전체사회의 복지라는 명분으로도 유린될 수 없는 정의에 입각한 불가침성이 있다. 정의에 의해 보장된 이 권리들은 어떠한 정치적 거래나 사회적 이해타산에도 좌우되지 않는다.” - 존 롤스 - |
롤스의 이론이 칸트를 따르는 두 번째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의의 원칙들은 제대로 이해되기만 하면 실제 계약이 아닌 가상의 계약에서 도출될 수 있다는 겁니다. 롤스는 이 이론을 ‘무지의 장막’이란 개념을 도입해 아주 멋지고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존중해야 하는 기본권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권리와 의무라는 기본 틀에 도달하기 위한 전제죠. 우리가 모여서 공동의 삶을 지배할 원칙들을 채택하려면 각자에게 중요한 특수성을 몰라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한데 그게 바로 부지의 장막이란 개념입니다.
지금 이 강당에 우리가 모인 것처럼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서 공동의 삶을 지배할 정의의 원칙들을 만든다고 칩시다. 각자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수많은 제안이 충돌할 겁니다. 누구는 튼튼한데 누구는 약하고 누구는 부자인데 누구는 가난하죠. 그래서 롤스의 대안은 원초적인 평등을 가정하자는 겁니다. 그 평등을 보장하는 장치가 바로 ‘무지의 장막’입니다. 우리가 무지의 장막 뒤에 있다면 일시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모르는 추상의 상태, 무지의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인종이나 계급, 사회적 지위나 장단점, 건강상태마저 모르는 것이죠.
롤스에 따르면 바로 그때에만 우리가 동의한 원칙은 정의의 원칙이 되고 가상의 계약이 효력을 발휘하는 겁니다. 이런 가상의 사회계약은 어떤 도덕적 효력을 가질까요? 그 효력은 실제계약이 갖는 효력보다 강할까요? 약할까요?
■ 실제계약의 도덕적 효력
1. 실제계약은 어떻게 나를 구속하거나 의무를 지우는가? a. 합의에 따른 의무 ⇒ 자율 b. 상호이익에 따른 의무 ⇒ 상호이익 2. 실제계약 내용의 공정성은 어떻게 보장되는가? |
이 질문에 답하려면 실제계약이 가진 도덕적 효력부터 파헤쳐봐야겠죠. 두 가지 질문을 해 봅시다. 첫째는 ‘실제계약이 어떻게 나를 구속하고 내게 의무를 지우는가?’입니다. 둘째는 ‘현실세계의 실제계약은 그 내용의 정당성을 어떻게 보장하는가?’입니다. 롤스나 칸트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이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즉, 실제계약이 정당한지 여부는 ‘모른다’입니다. 그 계약 자체만 놓고 보면요. 실제계약 그 자체만 보고 도덕성을 판단할 순 없습니다. 어떠한 실제계약이나 합의도 그 내용의 공정성에 대한 질문을 피할 순 없습니다. 동의했다는 사실 자체로 꼭 공정했다고 볼 순 없는데 미국의 노예제도 존속 법만 봐도 알 수 있죠.
노예제도도 동의를 얻은 실제계약이지만 모두가 동의했다고 그 법이 꼭 공정하라는 보장은 없는 겁니다. 그럼 첫 번째 질문, 실제계약이 어떻게 우리를 도덕적으로 구속하지는 봅시다.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보죠. 우리가 거래에 합의했다고 합시다. 내가 여러분한테 백 달러를 줄 테니 바닷가재 백 마리를 잡아오라고 했습니다. 계약에 따라 여러분은 바닷가재를 잡아왔는데 내가 친구들하고 바닷가재를 다 먹고는 돈을 안 줍니다. 여러분이 책임지라고 따지는데 내가 ‘왜요?’하면 뭐라고 할까요? ‘그렇게 하기로 거래했잖소! 그 거래로 선생은 이익을 봤소. 바닷가재를 다 먹었으니까.’ 그럼 반박을 하기 어렵겠죠. 내가 상대의 수고로 이익을 봤다는 사실에 근거한 주장이니까요. 이렇게 계약은 때로는 상호이익을 전제로 서로 간에 구속력을 갖습니다. 내가 바닷가재를 먹었으니 잡아온 사람에게 백 달러를 줘야죠.
그럼 두 번째 경우를 봅시다. 똑같은 계약입니다. 바닷가재 백 마리에 백 달러를 주기로 했는데 2분 뒤에 여러분이 일하기 전에 마음이 바뀐 제가 전화를 했습니다. 이 경우엔 이익이 없죠? 여러분도 일을 안 했으니 서로 주고받을 게 없습니다. 이 경우에도 제가 돈을 줘야 하나요? 단지 합의를 했다는 사실만으로? 그래도 제가 빚졌다는 분? 왜죠? 네 말씀하세요. 제가 왜 빚졌죠? 2분 뒤에 전화했고 일도 안 했는데?
- 제가 이 계약을 하는데 들인 시간과 노력이 있으니까요. 일을 할 것이라는 심리적인 기대도 있고요.
- 시간이 들었다고 했는데 전화상으로 방금 한 계약이라면요?
- 그건 정식계약이라고 할 수 없죠.
- 팩스로 보냈다고 하죠. 뭐 금방 가니까.
- 노력이 들어간 이상 그 계약은 유효하고 효력을 가져야 합니다.
- 하지만 왜죠? 도덕적으로 어떤 점 때문에 내가 책임을 져야 하죠? 동의했다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학생은 일을 안 했고 나도 이득을 본 게 없는데요.
- 머릿속으로 바닷가재 잡는 일을 다 했을지도 모르잖아요.
- 머릿속으로 바닷가재 잡는 일을 다 했다고요? 그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그게 뭐 대수죠? 바닷가재 잡는 걸 상상하는 일이 백 달러의 가치가 있나요?
- 백 달러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손해는 봤을 수 있죠.
- 정 그럼 보상으로 1달러 주죠. 재미있는 건 여전히 계약의 상호이익이란 차원만 지점하는군요. 날 위해 어떤 일을 한다는 상상이나 기대만 말하잖아요.
- 그럼 두 사람이 결혼에 합의했는데 2분 뒤에 갑자기 한쪽이 변심했다면 이 계약은 구속력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물론 대가를 지급한 사람도 이익을 본 사람도 없습니다.
- 계속 없다고 하면 어쩔 겁니까?
- 할 수 없죠.
- 좋습니다. 이름이 뭐죠?
- 줄리안입니다.
- 고마워요, 줄리안 좋은 지적이군요.
- 자, 줄리안처럼 아직도 내가 빚졌다고 생각하는 분? 다른 어떤 이유에서라도... 좋아요! 말씀하세요.
- 계약을 물리면 계약제도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봅니다.
- 좋아요. 근데 왜요?
- 칸트적 사고인 것 같은데 계약을 했다는 것 자체엔 사람들이 그 이행을 기대하는 본질적 가치가 있으니까요.
- 스스로 의무를 부과하는 계약 전체의 개념을 훼손하기 때문인가요? 이렇게 정리하면 될까요?
- 네.
- 이름이 뭐죠?
- 애덤입니다.
애덤이 지적한 건 상호이익이나 상호교환이 아니라 단순히 합의했다는 사실 그 자체죠. 지금까지 말한 실제계약의 두 가지 의무성립요건을 정리해 봅시다. 첫째는 자발적인 동의와 관련된 건데 애덤이 칸트적 사고라고 한 건 올바른 표현 같군요. 자율이란 관념에 직결되니까요. 계약을 할 때 그 의무는 스스로 부과한 것이기 때문에 도덕적인 무게를 가집니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 그 자체로요. 계약이 도덕적 효력을 갖는 두 번째 요인은 실제계약이 상호이익의 도구라는 생각과 관련된 것으로 상호이익이란 관념에 직결됩니다. 즉 내가 상대에게 의무가 있는 이유는 상대가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줬기 때문이죠.
지금까지 살펴본 실제계약의 도덕적 효력은 곧 도덕적 한계를 뜻하는데 이제 그 실제계약의 도덕적 한계가 무엇인지 논의해 보겠습니다. 상대가 이걸 하면 난 이걸 하겠다는 계약의 도덕적 성립요건은 다 알겠죠?
첫 번째 한계는 서로 합의했다고 해서 그 계약이 공정하란 법은 없다는 겁니다. 제 아들 녀석 둘이 어렸을 때 야구카드를 수집해 거래하더군요. 형은 동생보다 두 살이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거래의 규칙을 정했죠. 아빠의 허락을 받아야 거래가 성립된다고요. 이유야 뭐 뻔하죠. 형이 이 카드의 가치를 더 잘 아니 동생을 속일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 합의가 공정했는지 심사를 했던 겁니다. 가부장주의라고 비난하시렵니까? 그래도 할 수 없죠. 부권은 이럴 때 필요한 거니까요. 이 야구카드 사례는 뭘 말합니까? 합의했다는 것 자체가 그 내용의 공정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거죠.
몇 년 전 시카고에 사는 84세 미망인 로즈 부인의 얘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이 부인의 아파트 변기에 물이 샜답니다. 부인은 부도덕한 사람과 계약을 했죠. 변기를 고치는데 5만 달러나 요구했거든요. 부인의 정신은 온전했지만 세상 물정을 몰랐는지, 그 업계의 시세를 몰랐는지 아무튼 덜컥 계약했습니다. 다행히 은행에 가서 2만 5천 달러를 인출할 때 이 사실이 밝혀졌죠. 은행원이 그 많은 돈을 어디 쓸 거냐고 묻자 ‘변기가 새서요.’라고 했거든요. 은행원이 당국에 전화해 이 부도덕한 업자가 적발됐죠.
여기 모인 분들 중 가장 열렬한 계약론자도 이 말엔 동의할 겁니다. 부인이 합의했다는 것 자체가 이 계약의 공정성을 보장하는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이죠. 혹시 반론을 제기할 분? 아무도 없군요. 제가 못 본 건가요? 알렉스 어디 있죠? 그럼 다 동의하는 걸로 알고 정리하면 계약을 이행할 의무는 꼭 실제로 계약을 해야만 생기는 건 아닙니다. 실제계약의 도덕적 한계를 더 강경하고 논쟁적인 어투로 말하면 계약, 즉 동의행위 자체는 이행의무 성립의 충분조건도 필요조건도 아니라는 겁니다. 이 말은 곧 상호이익이란 면에서 거래에서 이익을 보는 쪽이 있다면 동의행위 없이도 의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거죠.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8세기 스코틀랜드의 도덕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일화입니다.
초창기에 흄은 자신의 저서에서 로크의 원초적 사회계약 개념을 비판했죠. 흄은 이 계약론적 개념이 철학적 허구라며 경멸했습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징 신비롭고 불가해한 작용 중 하나가 바로 이 사회계약이란 개념이다.” 한참 뒤, 그의 나이 62세에 흄은 동의에 입각한 의무를 부정한 자신의 견해가 시험대에 오르는 경험을 합니다. 흄은 에든버러에 있는 집을 제임스 보스웰이란 친구에게 빌려줬고 보스웰은 다시 그 집을 세를 놨죠. 세를 든 사람은 이 집을 수리하고 도색해야겠다고 생각해 업자를 고용했고 집을 다 칠한 도색업자는 흄에게 비용을 청구했습니다. 흄은 동의하지 않았단 이유로 거절했죠. 자기가 업자를 고용한 게 아니니까요. 이 사건은 법정으로 갔습니다.
도색업자는 말했죠.
“흄 씨가 동의하지 않은 건 맞지만 그 집은 칠해야 했고 난 꽤 잘했잖소. ”
이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여긴 흄은
“이 업자의 유일한 논거는 작업이 필요해서 했다는 건데 타당한 주장이 아닙니다. 이 주장대로라면 이 자는 주인들의 동의 없이 에든버러에 도색이 필요한 집은 다 칠해도 좋습니까? 그러고는 도색을 해야 했고 그래서 집이 더 나아졌다고 해도 된단 말입니까?”
흄은 동의 없는 이익에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논리를 싫어했지만 소송에 패해서 돈을 지급했죠. 또 다른 사례로 동의에 입각한 의무와 이득에 입각한 의무가 어떻게 다른지 때로는 어떻게 양립하는지 살펴보죠. 이 사례는 몇 년 전에 제가 직접 겪은 일인데요. 친구들과 차를 타고 시골에 갔다가 인디애나 주 해먼드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휴게소에 들렀다가 출발하려고 보니 차에 시동이 안 걸리더군요. 다들 차엔 문외한이라 난감하던 차에 바로 우리 옆에 밴이 한 대 들어왔습니다.
‘샘의 이동식 수리차량’이라고 쓴 밴이었죠. 이 밴에서 한 남자가 내리더니, 아마 샘이었겠죠? 우리한테 “도와줄까요?” 하더군요. 자기는 시간당 50달러를 받고 일하는데 5분 안에 차를 고치면 50달러를 주고 한 시간 동안 손을 봐서 못 고쳐도 50달러를 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댁이 우리 차를 고칠 확률이 얼마나 되느냐고 했죠. 그 남자는 대꾸하지 않고 핸들 축 밑을 여기저기 살펴보더군요. 잠시 뒤 핸들 축 밑에서 나온 남자는 말했죠.
“점화계통엔 이상이 없지만, 아직 45분 남았는데 엔진룸도 볼까요?” 저는 “잠깐! 난 당신을 고용하지 않았는데? 우린 동의한 게 없잖소?” 남자는 불같이 화를 내더군요. “내가 차를 고쳤어도 그럴 셈이었소?” 절 말했죠. “그럼 얘기가 달라지죠.”
굳이 동의에 따른 의무와 이득에 따른 의무를 설명하지는 않았지만요. 어쨌든 그 사람은 직관적으로 운 좋게 차를 고치면 50달러를 줄 것 같았는데 저도 그런 눈치는 챘지만 자기 추론이 오류였다는 걸 알고 화를 낸 것 같습니다. 암묵적으로 우리가 합의했다고 기정사실화했다는 데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것은 계약의 두 가지 측면을 구분하지 못한 오류를 범한 거죠. 네, 저도 동의합니다. 그때 차를 고쳤다면 50달러를 줘야겠죠. 하지만 그 이유는 동의했기 때문이 아니라 남자가 차를 고쳐서 제가 이익을 봤고 상호이익과 공정성이란 면에서 제가 빚을 졌기 때문이죠.
자, 또 다른 사례를 통해 살펴볼까요? 이 계약의 두 가지 도덕적 성립요건을요. 그 전에, 이 사례에서 제가 옳다는 분? 역시 많군요. 제가 잘못했다는 분? 없나요? 잘못했다고요? 왜죠? 말씀하세요.
- 문제는 이익이란 게 주관에 따라 달라진다는 거죠. 난 차를 고장 내고 싶었는데 그 사람이 고친 거라면요?
- 고장 낼 생각 없었는데요.
- 이 경우엔 그렇지만...
- 차가 고장 나길 바라는 사람도 있나요?
- 있을 수도 있죠. 흄의 경우에도 도색업자가 집을 파랗게 칠했는데 흄이 파란색을 싫어했다면요? 누가 어떤 일을 하기 전에 그 이익이 뭔지를 확실히 해야죠.
- 좋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논제의 결론을 내리면 동의가 의무발생의 필요조건이라는 건가요?
- 물론이죠.
- 그래요? 이름이 뭐죠?
- 네이트입니다.
네이트 말은 안 그러면 그것이 동등한 거래인지, 공정한 이익인지 모른다는 거죠.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주관적인 평가는 달라질 테니까요. 네 타당한 지적입니다. 이번엔 또 다른 사례로 계약의 이 도덕적 측면들이 어떻게 연관돼 있는 지 살펴보죠.
내가 결혼을 해서 20년 동안 아내한테 충실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알았습니다. 매년 시골로 같이 여행할 때마다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것을요. 인디애나 고속도로에서 밴을 탄 남자를요. 꾸며낸 얘기니까 오해는 마시고 도덕적으로 저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분개하겠죠?
첫째는 서로 합의했는데 아내가 약속을 어겼다는 사실. 동의란 요소 때문일 겁니다. 제가 도덕적으로 분개하는 두 번째 이유는 그런 계약과는 상관없이 난 그동안 충실했는데 그 대가가 겨우 이런 배신이냐는 분노겠죠. 즉 상호이익이란 요소 때문일 겁니다. 일반적으로 각각의 이유는 도덕적 효력 역시 다를 수밖에 없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약간 다른 결혼의 예를 들어보죠.
이번엔 결혼 생활 20년째가 아니라 방금 결혼한 경우입니다. 인디애나 해먼드로 신혼여행을 갔을 때 똑같은 배신행위가 일어났습니다. 결혼계약을 하긴 했지만 네 능력을 보여줄 기회는 없었죠. 계약이행능력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도 저는... 그만하세요. 그래도 저는 줄리안처럼 따질 수 있겠죠. ‘약속을 했잖아!’ 이 경우엔 순수하게 동의의 요소만 있죠? 이익을 본 것도 없고... 무슨 말인지 알죠?
요점은 이겁니다. 실제계약이 도덕적인 힘을 갖는 근거는 두 가지 다른 관념, 자율과 상호이익이란 거죠.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실제계약이 항상 애초에 그 계약에 도덕적 힘을 부여한 이 관념들을 구현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율은 각 이해세력 간의 협상력 차이로 구현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상호이익은 각 이해세력 간의 정보력 차이로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고요. 따라서 동등한 가치를 갖는데 정말 중요한 것들을 혼동할 수도 있습니다.
자, 여러분이 계약했다고 칩시다. 자율과 상호이익이란 관념들이 우연성에 좌우되지 않고 반드시 구현되게 하려면 어떤 계약이어야 할까요? 권력과 지식의 차이가 없는 동등한 세력들의 계약이어야겠죠. 서로 입장이 다르지 않고 동등한 사람들의 계약일 겁니다. 롤스의 정의론엔 바로 이런 생각이 깔린 겁니다. 정의를 논하려면 무지의 장막에 가려진 사람들이 가상의 계약을 맺어야 합니다. 동일한 조건에서 권력과 지식의 차이를 잠시 배제하자는 겁니다. 그 차이가 불평등을 낳는 걸 원천적으로 막자는 거죠. 따라서 칸트와 롤스에게 동등한 사람들 사이의 가상의 계약은 정의의 원칙을 정하는 유일한 방법인데 그 원칙들이 뭔지는 다음 시간에 계속 얘기해 봅시다.
* 저작권은 PBS / Harvard University에 있고, 번역은 EBS 방송에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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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세기 독일의 철학자로서 비판철학의 창시자인 이마누엘 칸트의 윤리학에서 모든 행위자가 무조건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도덕률. 이 도덕률의 타당성이나 근거는 어떤 배후의 동기나 목적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예컨대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네가 유명해지고 싶으면 도둑질을 하지 말라"와 같은 욕망과 결합된 가언명령(假言命令)과는 다른 정언명령이다. 칸트에 따르면 단 하나의 정언명령만이 있다. 그는 이 정언명령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정식화했다.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말은 순전히 형식적 또는 논리적 진술이며, 행위의 조건이 도덕성보다 합리성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정언명령은 다음과 같은 정식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너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인격을 항상 목적으로 다루고 결코 수단으로 다루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