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럴드 메이의 의지와 영>
제 3장 연합의 경험: 관상적 영성을 위한 패러다임 -1
황지연 소장(한국영성치유연구소)
Gerald May는 3장에서 관상적 영성의 중심개념으로서 연합의 경험에 대한 논의를 전개한다.
우선 여러 종류의 영적 경험들이 있는데, 은혜나 성스러운 사랑의 좀 더 수동적인 수용에 의해 사람들이 즉각적이고 극적으로 변형되는 것으로 느끼는 변환의 경험; 치유, 예언 혹은 방언의 은사적 경험들;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다마스커스로 가던 중 바울에게, 그리고 많은 중세의 기독교 신비가들이나 주요 종교의 창시자들에게 일어났던 것과 같은 그런 환상이나 계시의 경험들이 있다. 또한 초감각적인 지각작용이나 심령의 대화 등등이 연관된 심령현상의 경험과 함께 악명 높은 귀신들림의 경험들이 있다.
좀 더 난해하게는, 넓은 의미에서 직관적이라고 불리는 여러 가지 경험들이 존재하는데 이는 표면적인 양상 아래에 무엇이 실제로 진행되는지에 대한 내적인 감각을 얻는 경험들이다. 여기서의 직관이란 진짜 직관이 하는 것보다 더 많은 행동, 해석, 그리고 자기-정의에 관련된, 일종의“세 번째 귀로 듣는” 능력인 “육감(hunch)”이라고 널리 알려진 것에 더 가깝다. 어떤 사람들은 강한 직관적 감각을 갖고 태어나며, 그것이 특별히 영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자주, 사람들은 묵상이나 침묵기도와 같은 영적 훈련과정에서 직관적인 능력을 발견한다.
May가 언급한 이런 모든 종류의 영적경험들은 속성에 있어서 경험자의 성격, 환경, 문화와 같은 요소에 의해 강한 영향을 받으며, 동시에 그들은 모두 그 경험동안의 자기감의 유지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 때문에 그들은 모두 자기-경계(self-defining)의 경험들이라고 불릴 수 있다. 그러나 한편 그런 경험들보다 훨씬 더 자주 일어나는, 다른 문화와 환경들 안에서는 보편적으로 보이는,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자기-경계의 상실(loss)로 특징지어지는 한 종류의 영적인 경험이 있다. 이것은 연합의 경험으로서, 의식, 신비 그리고 존재의 근본적이고, 예증이 되는 자기-상실의 경험이다. 그것은 진정한 직관과 근본적인 자발성의 구성요소가 된다. 이것이 관상적 영성의 요지이다.
자연스럽게 연합의 경험이 일어나는 경우, 사람은 갑자기 삶에 “빠져드는” 것을 느끼며, 시간이 고요히 멈춘 듯이 정지된 순간에 “붙잡히며”, 즉각적으로 완전히 깨어있고 개방되므로 자각이 그 양쪽범위 전체에서 최고점에 달하게 된다. 직접적으로 주위를 둘러싼 환경 안의 모든 것이 놀라운 명료함으로 경험되며, 의식의 거대한 파노라마가 열려진다. 그 경험의 기간 중에-종종 길지 않은-정신 활동은 정지된 것으로 보인다. 이전의 생각들, 불안이나 걱정들 그리고 욕구들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완벽하게” 남겨둔 채 모두 증발한 것으로 보인다. 보통은 거기에 어떤 반응적인 감정, 즉 그 경험의 끝을 향하여 일어나는, 두려움, 경탄, 포용력, 자유, 열정, 사랑, 그리고 완전한 진리 혹은 ‘진실’의 감각과 같은 감정이 있으며, 그 경험이 끝난 후 하나가 되었던 것에 대한 거의 변하지 않는 기억이 있다. 이런 연합의 경험은 앞서 언급했던 다른 어떤 경험보다 훨씬 더 흔히 그리고 보편적으로 일어난다.
연합의 경험을 위한 환경은 보통 아주 순간적이며 자주 어떤 정해진 특별한 상황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대부분 연합의 경험들을 자연에서 가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산맥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거나 혹은 바다의 수평선너머로 그것이 저무는 것을 바라보거나, 숲속을 따라 걷다가 기대치 못한 폭포에 이르거나, 빗속에 서 있다가 그 리듬을 느끼거나, 혹은 무한한 별빛이 총총한 겨울밤을 응시하는-이런 순간들과 같은 것이 아마 가장 일반적일 것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연합의 경험은 때로 심포니를 듣거나 혹은 위대한 그림, 혹은 특별히 감동을 주는 시를 읊을 때와 같은 미학적인 환경에서 일어난다.
종종 사람들은 성관계나 깊은 나눔 혹은 화해의 시간과 같이 다른 사람과 사랑하는 친밀함의 순간에 그런 경험들을 보고한다. 비슷하게, 그들은 아이의 탄생,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 심각한 질병, 혹은 중대한 위기와 같은 삶의 주요 사건들 동안에 일어날 수 있다. 커다란 스트레스나 그것에서 놓여남이 모두 연합의 경험을 위한 계기로 작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군인들이 격렬한 포화 속에서 혹은 전쟁이 중지되고 난후 그런 경험들을 보고했었다.
종교나 영적인 훈련들 또한 연합의 경험들의 자각을 격려하는 것으로 보이며, 그것들이 예배나, 피정, 묵상이나 기도 중에 일어난 것이 보고되곤 했다. 지나친 피로, 감각의 박탈, 여러 가지 화학약품들(특히 환각제 혹은 환각 약품)의 사용 그리고 정신분열병의 전구 단계에서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경험들이 일어날 수 있다. 물론 이런 건강치 못한 경험들은 일반적으로 충분히 연합적이지는 않다. 그 대신, 그들은 시간감각의 변화와 자기-경계의 확산과 같이 일반적으로 연합경험의 오직 어떤 일부 요소들만을 포함한다.
연합의 경험들이 일상적이지 않은 상황이나 환경에서 발생한다고 자주 보고되기는 하지만, 다만 그들은 반드시 자발적으로 생겨나며 아무런 전조 현상이 없다. 무엇인가가 우리의 존재함이나 혹은 내가 갑자기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깨달음을 향해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키며, 아주 빠른 순간동안, 그 경이로움은 자신을 개방하고 우리는 그것과 하나가 된다. May는 한 영업사원의 얘기를 예로 드는데, 그는 여러 해 동안 알콜 중독으로 괴로워하였고 실망스럽던 여러 가지 치료방법에 참여했었다. 그러던 몇 년 만에 그가 인사차 들렸는데 그는 유쾌히 그러나 지나치게 자만하지 않으면서 지난 2년간 술을 끊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 변화가 어느 날 길을 걸어가고 있는 동안 일어난 한 번의 단순한 연합의 경험 때문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그는 그날 주변 환경에 아무런 특별한 것이 없었으며 그 전에도 같은 산책을 여러 차례 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어떤 이유에서건, 그것은 일어났으며, 그의 삶에 대변혁을 일으켰다. 그는 아주 명랑하게, “식료품 가게로 걸어가면서 나는 마음의 평정을 발견했어요”라고 했다.
May는 연합의 경험들이 인간존재의 삶 안에서 나이, 문화, 성격유형 혹은 역사적인 시기에 관계없이 아주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으로 보이나 현대 서양 문화의 주도적 의지에 입각한 생각, 계획, 행동에 대한 편견이 그런 순간에 응하거나 개방적이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한편, 연합의 경험에 대한 최근의 많은 대중적인 흥미들은 그 경험을 인위적으로 일어나게 만드는 형식으로서 명상, 환각을 일으키는 약품, 그리고 생체 자기 제어(biofeedback)를 포함한 갖가지 방식의 “의식의 변형”을 제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시도들의 결과가 상당히 관심을 끌기는 하나 실제적인 연합의 경험이 될 수는 없다. 다만 그런 양식들과 함께 최면과 같은 황홀경, 여러 가지 상태의 환상, 그리고 깊은 이완을 포함하는 정신상태의 광범위한 다양성이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뇌파의 영상이 이런 방식으로 인위적으로 소개될 때 마음은 그 시간에 가장 적합해 보이는 어떤 것이든지 선택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할 수 있을 때조차 연합의 경험을 선택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에 대해서 May는 연합의 경험이 느리고 동시 발생하는 뇌파 패턴과 관련되어 있을 수는 있지만 이런 패턴들이 결코 항상 연합과 연관되는 것은 아니며, 뇌파 생체 자기 제어 훈련의 결과가 긴장을 풀게 하고, 종종 원기를 회복시키며, 가끔씩 극적이기는 하지만 연합을 경험하게 하는 적은 거의 없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관찰이 약물이나 명상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도 있을 수 있다. 여러 가지 약물들을 통해서 자각의 내용이나 질적인 것은 분명히 변할 수 있으며, 술이나 진정제는 진정작용으로 혼란스러움을 줄여주는 것과 함께 각성된 상태를 줄여준다. 그러나 이런 방식들은 사람들이 몰두, 집중, 그리고 걱정으로부터 일시적인 휴식을 얻는 방식으로서 둔해진 자각에 의해서 “느슨해지려고”하는 습관적인 방식들일 뿐이다. 한편 LSD와 같은 강력한 환각성 약품들과 암페타민과 카페인과 같은 흥분제나 자극제들은 일반적으로 그 반대의 효과를 갖는다. 그들은 확장되거나 열려진 자각으로 이끌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들은 자각의 어떤 내용들을 가지고 주의의 혼란과 집중을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을 수도 있다. 마리화나는 여러 가지 효과를 갖는 것으로 보이는데, 때로는 무디어지게 하는 진정제로서 그리고 다른 때는 환각제와 같이 작용한다. 그러나 한 번에 혼란이나 제한을 줄임과 동시에 자각을 일깨우는 효과를 가진 화학약품이 발견된 적은 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어떤 형식의 묵상들은 연합의 경험이 일어나게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많은 영적인 전통들에 의하면 이상적인 묵상의 상태는 그 안에서 자각이 완전히 깨어나고, 개방되며, 고요하고, 맑고 또한 평온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묵상 훈련이 그런 상태를 함양시키는 것이 분명하기는 하나, 그것이 연합의 경험을 일어나게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자각에의 깨어있음과 개방됨은 단지 연합 경험의 일부분일 뿐이다.
동방과 서방 양측 관상적 영성 교사들은 묵상 중에 무엇인가 생겨나게 하려는 시도는 반드시 방해가 된다고 계속해서 주장한다. 어쩌면, 자각에 개방됨과 깨어있음이 “생겨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묵상의 교사들은 종종 물결을 잠잠하게 하려는 그 어떤 노력도 단지 더 많은 물결을 만들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이상적으로 묵상은 모든 것을 정지하므로 사물들이 그들의 자연스러운 상태에 놓일 수 있도록 허락되는 상황이어야만 한다. 아름다운 Hsing-Hsing Ming of Zen(선에 관한 시- 역자주)은 “당신이 행동을 멈추므로 고요해지려고 노력할 때, 당신이 성취한 고요함은 항상 움직인다”라고 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모든 것이 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바라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을 아는 것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알기를 원해서는 안 된다”라며 묵상뿐만 아니라 영적인 삶 전체에 관하여 이것을 되풀이해서 말한다. 이는 관상적 영성의 가장 중요한 주제들 중 하나다.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없고, 그것을 일어나게 할 수 없으며, 그것을 달성할 수 없다는 개념. 그것은 우리의 논의에서 반복적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하는 생각이다. 기독교 관상적 영성은 모든 연합의 경험들을, 은혜로 주어지는 그리고 인간 쪽에서 한 어떤 행위의 결과가 아닌, 하나님의 선물로 본다. 동방 기독교의 영성들은 연합의 경험을 모든 시도를 그친 이후에 남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 어느 쪽이든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런 경험들 쪽으로 쏠리게 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일어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약물, 생체 자기 제어, 그리고 자각의 다른 인위적인 조종들은 연합의 경험을 성취하려는 시도의 실패를 피할 수 없게 한다. 현대과학과 관상적 전승 모두는 이 점에 동의한다. 뭔가 영적인 것을 달성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자기-패배적이다.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무엇인가가 일어나도록 하려는 순종적 의지를 격려하는 것뿐이다. 고요함, 개방의 기도 혹은 묵상과 같은 관상적 훈련이 이런 순종적 의지를 품도록 도울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사람으로 하여금 연합의 경험에 대해 예민해지게 하므로, 연합의 순간이 더욱 자연스럽게 깨달아질 수 있게 될 것이다. 관상적인 훈련은 또한 일종의 광범위하게-자각된 온유함과 같은 것을 기르게 하므로 연합의 경험이 너무 퉁명스럽게 거절당하지 않게 하며 너무 쉽게 잊히지 않도록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다. 어느 전통의 관상적 훈련에도 그 사람 측의 어떤 행동이 연합의 경험을 일어나게 만드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들의 주도적 의지를 따라 조종-중독된 사회에서 사람이 연합의 경험을 일어나게 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런 경험들이 상당히 자주 어떤 정해진 환경이나 심리적인 상황에 의해 유발되는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것은 더욱 놀랄 것이 못된다. 이러한 견해는 어떤 원인-결과의 관계가 존재하며 또한 만약 우리가 어떻게 하는지 알기만 한다면 그것을 지배하고 조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결과로 뛰어들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러한 시도들은 오직 연합의 경험의 일부를 성취하게 할 뿐이었다. 완전한 것은 달성된 적이 없으며, 또한 관상가들은 달성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어서 May는 Abraham Maslow의 “절정 경험들(peak experiences)”에 관한 연구와 자신의 연구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통해 연합의 경험에 대한 논의를 전개한다. Maslow는 부분적으로는 절정 경험이 얻어질 수 있다거나 혹은 적어도 “촉진된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그런 “유발계기”를 알아보고자 했다. 절정 경험에 대한 그의 설명이 May의 연합의 경험에 대한 묘사와 정확히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는 많은 유사점들이 있다. 그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삶에서 가장 황홀했던 순간은 무엇이었는가?”와 같은 질문을 함으로서 그런 경험들에 대해 상기해보도록 그들을 격려했다. 이것은 가지각색의 설명적인 응답들을 만들어 냈다. 대조적으로, May의 결론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하나가 되는”, “그 시간에 몰두하는,” 혹은 “즉각적으로 현존하는” 것과 같은 어떤 독특한 특성을 가진 경험들을 기억하는가를 물어 보는 것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는 또한 사람들에게 “당신이 충분히-자각하고, 매우 분명하고 개방된, 그러나 당신 자신을 잊도록 굉장히 몰두했던 시간을 생각해보려 노력하라”고 요청했었다. 따라서 질문을 하는 바로 그 방식에서, Maslow는 “절정”경험을 찾고 있었고 May는 “연합의” 경험을 찾고 있었다. 유사점들은 많은, 그러나 전부는 아닌, 절정경험들이 공교롭게 연합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에서 나왔다. 여러 개의 같은 유발계기를 찾는 것에 덧붙여, Maslow는 절정경험에서 실존의 직접적인 인식에 관계하는 한 가지 구성요소를 확인했다. 그는 이것을 “존재함(being)의 지각됨”이라고 불렀다. 그는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 혹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절정 경험을 갖는다는 것”과 그런 경험들은 “과학적”이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비밀로 하며 비공개적이라고 느끼게 되었다.